1363주일 | 행17.15-34
복음의 빛을 비출 때 드러나는 3가지 얼굴들
마침내 복음은 그리스(Greece) 아테네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눈에는 다 하나님 없는 우상의 흔적들이었다(16). 바울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증거한다.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15-21) - 선교정탐
베뢰아에서 쫓겨나다시피 무려 320여 km를 건너온 아덴(15), 하지만 놀랍게도 도시는 우상들로 가득하고(16),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철학자들은 “이런 어리석은 말쟁이를 봤나!”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에 대해 많은 신들 가운데 단지 새로운 또 하나의 가르침 정도로 취급하며 빈정거리고(18-20), 그러니까 아덴은 이처럼 보다 새로운 것들만을 기웃거리는 분위기다(21). 하지만 바울은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16b):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영적으로 무지하고 무관심할 수 있을까.’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2-31) - 아덴설교
MESSAGE 성경(Eugene H. Peterson, 1932-2018)
22b-23 “내가 보니 아테네 시민 여러분은 종교를 진지하게 여기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며칠 전 이곳에 도착했는데 오가면서 발견한 그 모든 신당들에 놀랐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신에게’(‘TO THE UNKNOWN GOD’)라고 새겨진 신당도 있더군요. 내가 여기 온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던 그 신을 여러분에게 소개하여 여러분이 대상을 분명히 알고 예배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24-29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주문 제작한 신당에 사시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건사하지 못해 옆에서 시중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신 분도 아닙니다. 그분이 피조물을 만드셨지 피조물이 그분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무(無)에서 출발해 온 인류를 지으셨고 이 땅을 살 만한 좋은 곳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넉넉한 시간과 살 만한 공간도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둠 속에서 더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숨바꼭질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입니다. 그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시인들 가운데 누군가가 ‘우리는 하나님께 지음 받은 존재’라고 잘 말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지음 받은 존재라면 우리가 석공을 고용해서 돌을 깎아 우리를 위한 신을 만들겠다는 것은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생각입니까?
30-31 여러분이 아직 잘 모를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때가 지났습니다. 알지 못하던 그 신이 여러분에게 알려졌고 이제 그분은 여러분에게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그분은 온 인류를 심판하시고 모든 것을 바르게 할 날을 정하셨습니다. 이미 심판자를 지명하시고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에서 살리셔서 모든 사람 앞에 확증하셨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32-34) - 반응(응답)
[1] 첫 번째 얼굴(반응)은 히히덕거리며 또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다(32a): “바울을 비웃고 조롱하며 떠나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Message). 보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이렇게 살아간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세상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 그리고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에 노예가 된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골2.8). 주님과 진리를 좇아 사는 길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흔히 발견된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죄악의 도시 소돔 “이 곳을 멸하시려”(13)는 계획을 롯에게 알리시면서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는 기회가 예고된다. 이에 따라, 롯이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때도 지금과 같은 반응이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4)
[2] 두 번째 얼굴(색깔)은 결단을 다음으로 미루는 사람들이다(32b): “‘다시 들어 봅시다. 우리는 더 듣고 싶소’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Message) 첫 번 사람들보다는 약간 진일보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시간 이후는 내 시간이 아니다.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도 아니다. 아무 대책 없이 그냥 내일로 미루는 사람들에게 어떤 미래가 올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부자 비유>(13-21)에, 밭에 소출이 풍성하자 심중에 창고를 더 크게 짓고 곡식을 쌓아 두고 즐거워 하리라 한 부자가 나온다. 이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20)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이 없는 자에게는 내일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세 번째 얼굴(모습)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은 몇 안 되는, -“몇 사람이 … 믿으니”- 소수의 사람들이다(34a): “그날 그 자리에서 확신이 생겨 바울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Message) 이처럼 척박한 아덴에서 놀랍게도 아레오바고 관원(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복음 앞에 믿음으로 선다. 이들은 전심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로서 마침내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조신(人造神)들의 도시 아덴 앞에 선다. 이것이 복음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18a,21-24)
마치 온 동네(가족)가 다 다른 종교를 따르는 마을(가족)인데 그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헌신이었을 것 같다. 이들은 오늘(현재, 이 땅/현세) 편하자고 내일(미래, 저 땅/내세)의 불편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을 더하시는 은혜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 이처럼 복음의 빛이 내게 비추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