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7주일 | 창16.15-16, 21.1-7
신수성가1(神手成家): 이스마엘 vs 이삭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창21.9)
아브라함에게 주신 아들들이다. 이스마엘과 이삭이다. 그런데 한 아버지 안에서 전혀 다른 두 아들이 자란다. 그것도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다. 놀랍다. 이를 어찌할까.
이 두 아들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이런 시각은 중요하지 않다:
(1) 왜 이러는 것일까?
(2)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3) 누구의 책임인가?
그럼 중요하게 보아야 할 시각은 무엇인가:
(1) 무엇을 하고 있는가?
(2) 하는 언행이 이어지는 인생의 징검다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스마엘
*창16.1,10-16
‘브엘라해로이’(14) -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이라.’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를 찾아오셨다. 하지만 어머니 하갈이나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을 말하는 소리는 있으나 그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나 고백은 없다.
*창17.23-27
할례, 즉 행위언약 안에서 자란다. 오늘로 말하자면, 세례(유아세례)를 받은 자로 자란다.
*창21.20-21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함께 하시지만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급기야 하나님 없는 애굽 여인과 결혼한다. 어머니 하갈도 애굽 여인이고(창16.1), 아내 또한 애굽 여인이다. 그는 이렇듯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품으로 점차 이동한다.
*창25.12-18
야곱보다 먼저 번성한 가문, 12 족속을 이룬다. 그런데 끝까지 이스마엘에게는 하나님이 없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걸어온 믿음의 여정이 이스마엘의 인생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삭
*창18.1,10 → 21.1-5
*창21.1-7
*창22.7-12
*창24.7-9
*창25.11
그가 서 있는 곳, 그가 언행으로 만들어가는 삶이라는 징검다리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왜 그럴까?’라는 질문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유가 아니라 다름 아닌 그가 ‘지금’ 서 있는 모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인가 아닌가 가운데 그는 어느 한 쪽에 이미 서 있어서다. 그가 보여주는 ‘오늘’(지금, 현재)은 그의 가장 정직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좀 더 익숙하지만 그러나 그만큼 놀라게 하는 것은 이것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는 칭의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점이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조금은, 그러나 분명히 다른 두 아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