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4주일 | 행22.30-23.11
오늘은 예루살렘, 내일은 로마
예루살렘에서는 바울 길들이기와 죽이기가 계속되고 있다. 먼저는 유대인들이 그러더니(21.27- ) 이번에는 종교 지도자들까지 이 일에 가세한다. 그런 중에도 ‘그날 밤’(11)이라는 고난의 밤에 주님이 바울을 찾아오신다. 그러면 어떤 바울에게인가.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서도 죽음의 위기다. 그런데 그 바울에게 로마로 가라? 그럼 드디어 안전이고 평안인가. 그래서 11절 말씀을 주목한다.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11).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G -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9.15-16)
G -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22.21)
*P -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20.16.22)
*D -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21.4)
*W -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21.12)
*P - “나는 …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 이르니 … 성전에 들어가서”(21.15,17,26a)
*J -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 죽이려 할 때에”(21.27,31)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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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도...
P - “내가 거기(예루살렘)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19.21b)
G -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나의 일을) 증언하여야 하리라.”(23.11)
하지만 지금 바울은 ‘로마가기’는 고사하고 예루살렘에서 순교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오늘까지 예루살렘에서 할만큼 했으니까 좀 편해 보자고 내일은 로마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그는 지금 점차 좁혀지는 고난과 죽음의 포위망(위기) 앞에 놓여있다. 이렇듯 상황은 어둡고 암울하고 절박하다. 그럼에도 바로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신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11)
이 엄청난 말씀을 보라. 과연 어떤 사이이기에 ‘가서 죽으라!’는 말을 이처럼 서슴없이 하시는 것일까. 지금 바울은 복음 때문에 홀로 고독하게 감금되어 있다. 그런 바울을 찾아오셨다(10). 그리고 11절이다. 무엇을 말씀하실까 싶었는데 ‘그래, 이제 다음은 로마다.’ 하신다. 내일은 로마로 가라 하신다. 그렇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듯이 너도 로마에서 그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를 좀 더 생각해 보자: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없고, 모든 일들이 잘되고, 고생과 시련도 없고, 필승(必勝)과 축복이 있다. 어떤가,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예수 안에 이런 축복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오히려 지금 바울 같은 이 죽음(위기, 고난)의 오늘에도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어간다는 점이다(11). 그렇다면 고난과 역경도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이다. 따라서 그것에 영적 안테나의 초점을 잘 맞추어 보면, 그 고통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보이고, 그래서 환난 → 인내 → 연단 → 소망을 낳는 은혜를 다름 아닌 고난 안에서도 경험하게 된다(롬5.3-4).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 둘을, 그러니까 형통과 고난 이 둘 모두를 하나님이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알아가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믿게 된다.
우리는 “주님 안에 우연은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 더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고난은 나쁜 것, 형통은 좋은 것이라는 지극히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영적 풍성함과 자유함을 흐리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 방식과 경험대로 생각하고, 내 생각대로 행동하고, 내 마음의 확신을 따라 일하려는 유혹에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그제서야 회개하고, 울고, 잘못한 자기 죄목록표를 만들어서 하나 둘 갚아가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은 단단해지고 강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내 힘과 능력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이라는 거인이 나를 가로막고 서면, ‘아이구’ 낙심하거나, 멈추어 서 버리거나, 뒤돌아가 버리는 것은 옳은 반응이나 태도가 아니다.
그럼 무엇이 옳은 것일까. 내 편리한 방식을 따르려는 생각과 유혹을 버리고 이 일을 섭리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러면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가는 길이 결코 자기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는 이 진리를 고난 속에서 잊지 않고 알아가게 되었고 이를 체험한다. 하나님은 이렇듯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고, 듣게 하시고, 그래서 어떤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게 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십자가)이 없다면 성취(영광)도 없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시도하지 않으면 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문제 앞에 서지 않았다. 그는 실패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직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인가, 주님의 뜻인가를 묻고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소명의 사람으로 문제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문제 속에서도 열매를 맺어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깊은 고독과 고통의 나락에 처해 있는 절망의 때에라도 11절처럼 주님의 찾아오심(심방)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 바로 그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아, 하나님이 이번에도 무엇인가를 시작하시는구나!’ 그렇기에 내 문제만 커 보이는 못남을 떨쳐버리게 된다. 그래야 주님의 일하심과 섭리가 보이고 들리고 알고 믿고, 그래서 오늘은 예루살렘, 내일은 로마에서처럼 주님을 따르게 된다.
나에게도 오늘은 주님을 따르는 예루살렘인가.
내가 감당하며 받아든 예루살렘이 있는가.
나에게도 소명으로 가야 할 로마가 있는가.
양무리교회가 받아들어야 할 로마가 있는가.
주님은 나의 예루살렘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주님은 나의 로마는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그것이 고난 안에 잉태되고 있어도 바울처럼 받아들 수 있는가.
사도행전이라는 고난행전은 이처럼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