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7주일 | 행23.12-35
로마행전, 믿음이 이긴다.
이제 더 적극적이고 공개적이자 공격적으로 ‘바울죽이기’가 진행된다(12,15,21).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성전과 율법의 이름으로 복음을 거역할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을 죽이기까지를 계획하고 있다. 이것이 당시 예루살렘 분위기였다. 이렇듯 복음의 확장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과, 예루살렘에서부터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려는 바울의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만난다. 이때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은 바울만이 아니다. 이제 과연 바울은, 또한 복음 전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일하시는 하나님
식음을 전패한 <40인조 바울 암살단>이 바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왜 그런가?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바울은 안전하다. 바울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11b): ‘바울아, 넌 로마까지 갈거야!’ 그러니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기 전까지는 최소한 그의 목숨은 안전할 것이다. 바울 곁에 계신 주님이 말씀하신다: “걱정하지 말아라. 유대와 로마의 방해가 아무리 집요하더라도 네 곁에는 내가 있단다.” 하나님은 바울의 사명이 끝나는 때까지 바울을 사용하시겠다는 뜻을 그의 곁에 서셔서 친히 말씀해 주신다.
한편 <40인조 바울 암살단> 계획이 벨릭스 총독에게까지 보고 되었다. 하나님은 이 음모가 드러나고, 저들의 바울 죽이기 음모가 실행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바울의 생질(甥姪/외조카, 16a) → 바울(16b) → 백부장(17) → 천부장(18) → 총독(33)으로 이어지는 허다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천부장은 당시 자신의 휘하에 있는 1,000명의 수비대 가운데 보병 200, 마병 70, 창군 200, 이렇게 총 470명에 해당하는 병력, 거의 절반에 가까운 병사들을 저녁 9시에 바울 한 사람을 위해 투입한다. 이로써 ‘40 vs 1’이라는 외로운 싸움이 마침내 ‘40 vs 470’으로 바뀐다.
응답하는 바울
바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로마를 향한 복음의 열망, 그러니까 로마 선교의 비전을 품고 있었다: “내가 거기(예루살렘)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19.21b) 그러나 그는 이 꿈이 격려와 축복의 박수와 화려한 축하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목숨을 담보로 주어진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의 발걸음이 예루살렘이든, 다른 그 어디이든 자신을 ‘산제물’(롬12.1)로 이미 드린 것이다.
바울 이야기
이것이 예수를 믿고, 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만나는 고난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읽어내는 바울의 고난 영성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고난이라는 파도를 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 파도에 대항(저항)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릴 때도 그랬다. 그는 제물 없이 제사하러 가는 상황을 –아니다. 아브라함은 제물인 아들 이삭을 데리고 제사하러 가는 길이다.-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거나, 바꾸거나, 유추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 그대로 이삭을 드리는 순종과 믿음대로의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바울이나 아브라함과는 달리 우리의 고난은 꼬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고난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을 무시하고, 그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나의 생각과 의지가 개입하기 경우다. 이 말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열중쉬어’ 하고, 고난에 질질 끌려가라는 말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고난 안에 들어있는 섭리의 일정표를 조정하는 것을 멈추라는 얘기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바울과 같은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고통과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것을 인정하고 알고 믿어야 한다. 그런데 놀라고, 울고, 화내고, 부시고, 마시고, 던지고, 못하겠다 그러고, 마음대로 바꿔버리고, 비난하고, 너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교회와 믿음을 버리고, 그러니까 내 생각과 마음대로 상황과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역사가 일어날 기회가 없어져 버리게 된다.
‘바울을 죽이려고 하지 말고, 주와 복음을 위해 죽으십시오!’
하나님이 믿고 맡기실 수 있는 그런 믿음이 그리운 시대를 살아간다. 로마행전과 같이 우리행전 역시 믿음으로 써가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보다 앞서서 일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보다 앞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생각한다. 믿음은 하나님만을 믿는다. 믿음은 하나님만이 일하시도록 절제한다. 믿음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성취되어지도록 오래 참는다. 믿음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한다. 믿음은 아무 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의 것이다.
믿음은 운이나 요행이 아니며, 마지막으로 던지는 주사위에 맡겨진 확율같은 것이 아니다. 믿음은 도박이 아니다. 믿음은 한번 해 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나의 실패나 고난을 반전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믿음은 축복을 받아내기 위한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다. 믿음은 세상에서도 잘 되고 하나님께서 잘 되기 위한 얍쌉한 얌체의 도구가 아니다. 믿음은 내가 얻고 싶고, 누리고 싶고, 성취하고 싶은 내 욕망과 욕심을 위해 필요한 간절함이 아니다. 믿음은 내가 이루어내고 싶은 야망을 위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빼앗아 내는 그런 투쟁의 산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나를 쓰실 때 나의 그 어떤 것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 그러니까 하나님이 쓰실 때 내가 불편하지 않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믿음은 설령 내가 처해야 할 곳이 고난이어도 좋다는, 아니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내가 고생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기쁨으로 고난 당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니 내게 있는 것들을 좀 지켜보겠다고 좁스럽게 살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이다. 바울이 40인 암살단, 유대 종교 지도자들, 백부장, 천부장, 총독의 틈바구니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처럼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늘을 보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세상에서는 바울처럼 살아가는 길일지라도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하는 이유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말하는 믿음이다.
복음을 위해 일해도 돌아온 것은 감옥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얼마나 멋진 ‘생활행전’인가를 증명하면서 나그네 인생을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 있어도 행복을 잃지 않았다(16.25). 행복은 환경에 달려 있지 않다. 행복은 환경이 결정하지 않는다. 행복은 이 세상이 만들어주지 않는다. 바울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하는 사도행전 무대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등장하는 ‘우리행전’도 마찬가지다.
자, 그 가운데 누가 최후의 승자(勝者)일 것인가. 40인 암살단 앞에서 보여주는 바울에게서 깨닫게 되는 믿음이고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