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9주일 | 행24.1-9
더둘로처럼 살지 않아야 할 이유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1,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마침내 노예 출신으로 유대 총독(52-60)의 자리에 오른 벨릭스와 손을 잡는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앞세우고 총독 벨릭스와 바울 앞에 나타난다. 어떻게 된 것이 살리는 쪽이 아니라 어떻게든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이 전파되는 것을 막으려는, 이를 위해 바울을 죽이고, 하나님을 거역하기까지 하겠다는 것이다.
더둘로(Tertullus)
더둘로 또한 망하여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자로 추락한다. 누가의 손에 들어온 더둘로의 고소장이다(3-8). 그의 바울 고소장은 세상 끝날에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우는 부메랑(증거)으로 돌아올 것이다. 더둘로는 거짓으로 바울을 고발했지만 사도행전은 그 거짓을 통해 역으로 더둘로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바라본다. 그는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쓴 고소장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소년은 장난 삼아서 연못에 돌을 던진다. 하지만 그 돌에 맞은 개구리는 죽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소년처럼, 더둘로처럼 살아간다면 살리는 자가 아니라 죽이는 자가 될 뿐이다. 물론 더둘로는 이처럼 죽이는 자로 살기 위해 학문과 지식을 연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능을 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죄에 빠져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 뿐만 아니라 이후 영원한 세계까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또 있다. 그는 총독 벨릭스마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당시 유대 역사를 읽어보면, 총독 벨릭스는 결코 3절의 칭송을 받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악명 높은 탐관오리로 기억되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더둘로는 바울을 고소하여 그를 죽이는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던 폭군 벨릭스에게 ‘태평, 선견, 개선’(3)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까지 아첨으로 일관된 감사를 표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끌어들이는 수작에 능하다.
그가 이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어서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은 언제나 죄를 죄로 인식(인정)하는데 실패한다. 이유는 항상 죄의 기준이 자신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나 혼자 똑똑하고 의로운 척해 보아야 바보되기 딱이다. 먹이사슬(도미노)처럼 죄가 죄로 더불어 연결되어 있는데 말단 과장이나 월급쟁이인 나 혼자 성경대로 살겠다고 믿음을 외친다고 해서 그 불의한 관행(죄, 불법)가 없어질 것 같아요? 나만 ‘왕따’ 되거나 쫓겨나는 거죠. 어차피 죄악된 이 세상에서 생존하려면 적당히 눈감아주고, 모르는 척하고, 더 크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모르는 척 행세해야 그나마 살아남는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는 어떻게, 무엇이라 변명하고 부정하든지 죄는 죄(罪)다.”는 것을 아는 자다. 이처럼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때문에 교회에서 안 되는 것은 세상에서도,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안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성경대로, 세상에서는 세상 방정식대로는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안 되는 것은 끝까지 안 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더둘로, 너도 죄인이다.
죄는 반드시 드러나고, 또한 밝혀지는 때가 온다. 세상에는 간혹 완전범죄(完全犯罪)처럼 포장된 미해결 범죄가 있다. 시간과 권력이 잠시 죄를 덮고 감추어 놓아서다. 이처럼 권력은 강제적으로나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기반으로 공의를 짓밟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는 언제까지나 위장된 상태로 머물러 있게 할 수는 없다.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죄의 가장 큰 특징은 이것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는 점이다. 죄는 신앙을 파괴하는 악성 동맥경화(動脈硬化)와 같다. 죄가 쌓이면 쌓일수록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하나님과의 건강했던 교제(관계)가 깨지고, 그래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도가 막히는 증상이다. 기도의 능력과 은혜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기가 싫어지고, 급기야 기도의 시공간과 형식마저도 유지하지 못한다. 그 결과 기도의 질과 양이 점점 서서히 현저하게 떨어진다. 특히 기도의 시간이 짧아진다. 급기야 평상적인 식사기도, 취침기도 외에는, 하지만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을 때에는 일상적인 그 기도마저 하지 않게 되고, 그러면서 기도하는 것이 점점 어색해지게 된다. 왜 그런가. 기도는 영적인 건강의 척도(barometer)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영적인 것이 사라지면 그는 반드시 ‘대용품’(모조품, 유사품)을 찾게 된다. 무엇인가 자기 육신이 만족할 수 있을 만 한 것을 붙잡는다. 그렇게 무너진다.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영육(靈肉) 간에 손해는 커지는 법이다. 또한 죄는 재생산되는 특징이 있다. 죄(罪)는 결코 선(善)을 만들어낼 수 없다. 죄는 죄를 먹고, 다시 그 죄는 또 다른 죄를 낳는다. 이처럼 처음에는 내가 죄를 지었지만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죄가 점점 커져서 급기야 죄가 그 사람을 삼켜 버린다. 마침내 죄의 노예가 되어서 죄가 하라는 명령대로 행동하는 죄의 종이 되어 버린다. 이처럼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죄가 매우 자연스럽게 악의 열매를 맺게 한다. 이렇게 되면 될수록 죄에 대해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그러니 더 이상 죄를 괴로워하거나, 죄를 아파하거나, 죄를 슬퍼하는 것과 같은 영적 감각이 없어진다. 그러면서 무감각하게 무너져갈 뿐만 아니라 급기야 죄에 대해 무기력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죄의 값인 사망에 이르게 된다.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9)
이것이 죄의 실상이고 정체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으로 해결되는가?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다. 분명한 것은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에 관한 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 대제사장 아나니아, 백성의 장로들, 변호사 더둘로, 총독 벨릭스, 그리고 유대인들이 해결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죄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가. 이것이 사도행전과 사도행전 교회에서 들어야 하고, 알아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믿어야 하는 진리이다. 죄의 기준을 잃어버린 세대, 그러니 죄의 이름으로 의를 심판하는 시대, 그래서 죄가 자라더니 마침내 죄가 죄인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떵떵거리는 이 시대와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 것인가.
본문의 사람들에게는 답이 없다. 죄인이어서다. 그래서 우리는 10절 이후를 주목해 보아야 한다. 무슨 말인가. 죄인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어서 그렇다. 사도행전은 그래서 사건마다 말씀이 선포되면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