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1주일 | 행24.10-27
벨릭스 ‘전도행전’ 보고서
어찌 보면 복음은 참으로 연약해 보인다. 아무 능력이나 힘도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 서 있는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음은 마침내 벨릭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복음은 그 어떤 방해 세력 때문에 중단되지 않으며, 전파되고야 만다. 그 누구도, 어떤 나라도, 그 어떤 세력도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는 복음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얘기다.
벨릭스(Felix)처럼 살겠다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설교(10-27): 바울 vs 벨릭스
① 바울에게서 ‘죽은 자의 부활’ 설교를 듣다(10-21).
→ 이미 ‘죽은 자의 부활의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알고 있다(22a).
② 수일 후에 아내(유대인)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를 듣다(24).
→ 바울이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다(25a).
복음을 들을 기회를 뒤로 미루다(25b):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③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다(26).
→ 진리에서 점차 ‘돈을 받을까’(이권)로 관심이 바뀌다(26a).
④ 무려 ‘2년 동안’(27a)이나 바울이 전한 ‘복음’(하나님의 나라)을 들었다.
→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야망을 버리지 못하다(27).
벨릭스에게는 바울과 함께 했던 2년(27a) 동안에 여러 기회가 있었다. 그는 노예의 신분에서 일약 유대의 총독이라는 신분의 상승을 이룬 불세출(不世出)의 사나이다. 그러나 이 땅의 것 때문에 오는 세상의 것, 그러니까 영원한 것을 놓치고 마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한 시대를 살다가 이슬처럼 사라진다. 세상적으로 보자면 본문의 모습이 그의 인생에서 정상이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추락하기 시작하여 멸망의 자식으로 몰락한다. 왜 그랬을까? 바울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복음)을 끝내 거부했기 때문이다.
누가는 먼저 벨릭스가 복음의 소식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고 고발한다. 그는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22a). 자, 부활이 어떤 사건인가? 인류의 모든 죄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속량하시고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신 찬란한 새날 새아침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이것을 알았지만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냐, 아니면 세상이냐의 기로(岐路)에서 찰나적인 세상을 택하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유대인이었다(24a). 그렇다면 그는 아내로부터, 처가 식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이요, 메시아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22a)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역사의 현장에 와 있다. 그렇다면 그는 마음만 먹으면 이것이 풍문인지, 역사적 사실인지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아내와 함께 바울을 자주 불러 이야기하였다(26b)는 대목에서 더욱 그렇다. 이때 바울이 전한 복음은 크게 다음 세 가지 메시지이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25a)
그렇다면 다른 무엇보다 벨릭스는 바울이 전한 설교를 통해 다음 세 가지의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다. [1] 먼저, ‘의’(義)를 강론했다. 그는 옳고 그름의 판관은 오직 하나님이시다는, 그래서 자기 의는 교만이며, 또한 진리가 들어오는 문을 닫는 죄임을 알았어야 했다.
[2] 또한 ‘절제’를 강론했다. 정치적 야욕은 자기 패망의 원인일 수 있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제를 배움으로써, 욕망이 잉태하여 죄를 낳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았어야 했다.
[3] 마지막으로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다. 핵심은 이 땅이 다가 아니다는 복음이다. 세상 끝날에 선악(善惡)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함으로써, 그렇다면 벨릭스는 단지 복음을 아는 단계를 넘어서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았어야 했다.
무엇보다 벨릭스는 무려 ‘2년’(27) 동안이나, 그것도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시는 기회를 얻고 있었다. 그 과정 안에는 먼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고(10-21), 수일 후에 또 듣고(24),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26)였고, 그러기를 장장 무려 ‘2년 동안’(27a)이나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들었다.
하지만 벨릭스는 진리가 아니라, 그러니까 진리에서 점차 ‘돈’(이권)으로 관심이 이동한다(26a). 그는 참으로 많은 날, 또한 여러 사람들로부터 구원의 복음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따라 걷는 축복을 거부한다. 이것이 세상적으로는 가장 정상에 있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비극적인 삶으로 자신의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벨릭스의 모습이다.
놀랍지 않은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었다. 이것은 특별히 그에게 주어진 놀라운 기회였다. 하나님은 벨릭스에게 자신이라는 왕좌에서 내려와야만 ‘장차 오는 심판’(25)을 면하게 될 것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시대의 벨릭스와 같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참으로 다양한 채널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벨릭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지도 믿지도 행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문제인가, 벨릭스의 문제인가. 벨릭스는 회개할 많은 기회를 받았으나 끝내 그리스도의 품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오랜 시간 동안이나, 그것도 전도자 바울의 설교를 들었음에도 말이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Finding God In Unexpected Places)이라는 그의 책에서 조지 맥도날드의 메시지를 기억하며 말한다(채영삼 譯, 누란노, 1997, p.260):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 잘못에서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정죄받는다.”
하나님은 오늘 지금이라도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아직 천국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은 바로 ‘나’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은 벨릭스처럼 여전히 잘못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곁에 양무리교회를 세우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2년이 지나도 벨릭스 하나, 가족 하나, 자녀 하나 돌이키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바울의 설교를 들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벨릭스는 바울의 설교를 듣기 이전부터 복음에 대하여 지금 바울이 한 설교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22a). 그리고 또 설교를 들었고(10-21), 거기에다 수일 후에 다시 들었으며(24-25), 또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고(26), 무엇보다 2년이나 바울 곁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들었다(27). 그렇다면 벨릭스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