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주일 | 마26.31-46
기도의 영성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도대체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을까? ‘한 세분’(삼위일체) 하나님 아니신가. 그런데 하나님이신 주님께도 기도가 필요했다면, 그렇다면 무엇을 기도하셨을까. 이것들은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묵상할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다. 그것도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7b-38a)라고 하신 것에서, 이런 심정으로 기도하실 수 밖에 없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님 사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 그러니까 부자(父子) 관계이다. 사랑하는 아버지요 사랑 받는 아들(17.5)이, 무엇보다 사랑하는 세상(인류, 요3.16)을 위해, 다른 것도 아닌, 그런데 그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해야 하는 이 기막힌 역설이자 신비라 할 수 있는 십자가(十字架)를 앞에 두고서, 마침내 이처럼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하는 절대절명(絶對絶命), 이것은 동시에 자신의 뜻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붙들고서 지금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르셨고, 그리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셨다. 주님의 기도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39a)였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이 순간을 관찰한 것은 이렇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5.7a)
이 소원은 세 번이나 반복(39,42,44)해서 기도해야 할 만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박한 것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뜻이 아닌,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흐르면 안 되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에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러니까 내 뜻이 이루어지는 수단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목적을 위해 기도의 질(質)과 양(量) 모두에 승부를 걸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뜻(A)과 아버지의 뜻(B) 사이에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39a), 동시에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눅22.44)도록 기도하셨다. 이로써 마침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자고 쉬라!”(45a) 하시면서 십자가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셨던 것이다(45-46).
기도 前 기도 後
“고민하고 슬퍼하사”(37b) ――――[기 도]―――→ “일어나라 함께 가자!”(46a)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8a)
“시험에 들지 않게”(41a)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 기도를 시작하셨을 때, 그러니까 아직 자신의 뜻(A)과 아버지의 뜻(B)이 하나되는 기도의 응답이 있기 전에는 “고민하고 슬퍼하사”(37b),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며”(38a), “시험에 들지 않게”(41a)와 같은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고 계셨다. 그러나 기도가 마무리될 때에는, 그러니까 A와 B가 하나로 통합되어 하나님 아버지만을 바라보셨을 때는 고난받는 메시아로서의 전적인 헌신을 선언하시는 쪽으로 나아가셨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46a) 그렇다면 바로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가? 그렇다, ‘기도’가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기도다. 이것이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갖는 위대함이자 기도의 영성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41a)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겟세마네 기도의 영성은 ‘자기포기’(권리포기)다. 그것만큼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b,42b,44)라는 전적(全的) 헌신 앞으로 나아가셨다. 이것이 성자(聖子) 하나님의 자기비하(自己卑下) 신학이자 신앙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러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라면 영광의 보좌라는 아들의 자리에서 내려와 고난받는 메시아로서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시기로 결단하신 것이다. 이것이 겟세마네 기도에 들어있는 기도의 영성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결국 자신의 뜻을 아버지께 강청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을 위해 기도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드리는 대부분의 기도는 아버지를 설득하고, 이용하고, 감동시키고, 지극과 정성으로 포장하고(“지성이면 감천이다.”), 의심 없는 확신이라는 방법을 강화하고, 어떻게든 구하고 두드리고, 이처럼 어떤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결국 아버지의 손(창고)에 있는 것을 내 손(소유)으로 옮겨오는 것을 위해 끝까지 어리광을 부리고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응답되면 자랑이 있고, 자신의 기도는 능력이 있다는 쪽으로 가 버린다. 반대로 그렇지 않고 응답이 없으면 무능력한 자신의 기도에 늘 기죽어 산다. 이것이 기도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가운데 매우 중요한 그릇된 공식들이다. 이것이야말로 거짓되고 외곡되고 병든 기도의 영성인 것이다.
주님은 이처럼 기도를 이해하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목표하고 소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하나의 방법론 쯤으로 왜곡시켜 버린 기도에 대해서 일침을 가하신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주님이 과연 나처럼 무엇인가가 필요하셨을까. 다 창조주이신 당신 것인데 말이다.
주님의 기도 전(前, 37b,38a,41a)과 기도 후(後, 45-46)를 다시 봐 보자. 바로 그 사이에 세 번의 기도가 자리한다. 주께서 원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그랬으니 그것만큼 “나의 원대로”를 완전하게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뜻, 그러니까 아들 자신의 뜻과 아버지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41a) 하셨고, 제자들에게도 이를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기도가 가지는 또 하나의 매력은, 이처럼 기도는 시험(유혹, temptation, KJV)을 이기는 능력이다는 점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기도는 충분하게 능력이다.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후 마귀의 시험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갈보리로 나아갈 즈음에 기도가 시험을 이기는 열쇠라 하심으로써 전방위(全方位)로 찾아오는 시험을 이기는 길을 제시해 주신다. 이로써 나를 이기며, 죄를 이기며, 사탄을 이기는 기도에로의 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이렇게 기도를 통해 열리고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영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