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1주일 | 마27.1-26
빌라도와 유다, 유죄(有罪)인 이유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요18.31)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본디오 빌라도(AD 26-36)를 끌어들인다(1). 이에 빌라도는 정치를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 모두가 다 예수님을 살리는 것을 위해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인가. 예수님을 죽이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위해 종교적인 신성모독죄로 포장하기까기했다. 그랬을지라도 마지막 하나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형집행권은 로마의 유다 총독에게 있어서다(요18.31). 따라서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 위해서는 불법을 합법으로 포장하면서까지 종교와 정치가 적절하게 손을 잡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총독 빌라도(1-2,11-26)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18)
“빌라도가 이르되 어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23a)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사도신경 中)
명절이 되면 전례를 따라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하는 일이 있다. 이에 빌라도는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16) 하나를 생각해 낸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알”(18)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라도의 예상과는 다르게 군중들은 바라바를 요구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22b)라고 외친다. 그러자 빌라도는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23a)라며 주님을 변호하는 쪽으로 반전을 시도한다.
어떻든 빌라도는 심정적으로였을지라도 예수님에 대해 여러모로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참과 거짓 중에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는 흔들린다.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오직 자신을 살리는 쪽을 선택한다. 예수님마저도 버리는 카드일 뿐이다. 그는 점차 강도가 더해 가는 군중들의 반응을 보면서(24a), 오히려 폭동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불똥이 자기에게 옮겨올까 봐 슬그머니 발을 뺀다.
그는 정치적 실리를 위해 양심(종교적 원칙)과 사실을 팔아먹는 쪽을 택한다. 주님 편에 선 것 같지만 그러나 자기에게 불리하다 싶어지자 “나는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죄가 없소. 이것은 여러분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오.”(24b, 현대인의성경)라는 정치적 수사를 택하고 만다. 사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끝내 정치적 실리를 선택하고 만다. 그러니 지난 2천년 동안 [사도신경]을 통해서 그의 부끄러운 이름이 오르 내리고 있는 것이다.
빌라도를 보면서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본능을 선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또한 종교적인 소리마저도 외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찰나적인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짧은 ‘이생’(以生)과 권력 때문에 영원한 ‘내생’(來生)을 포기하며 추락한다. 빌라도 시대 때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딜레마(허상)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죄는 무엇인가.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빌라도는 히브리서 11장 6절이 말씀하는 믿음이 없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빌라도에게는 이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뜻을 이루어주는 일에 자신을 낭비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그러니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일에 나서지 못한 것이다.
둘째, 빌라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특별히 달란트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 맡은 종과 같은 사람이다(마25.14-30). 주인은 종 세 사람들 모두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15a), 자기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14)겼다. 그렇게 받은 종 가운데 한 달란트를 맡은 자도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달란트를 맡은 종에게도 주인의 소유를 이처럼 맡을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주인이 알고 맡긴다. 그런데 이 종은 주인과 다르게 움직인다.
지금 빌라도가 그렇다. 그는 예수께서 왜 자신 앞에 끌려왔는가를 잘 알았다. 그러나 마치 한 달란트 맡은 종처럼 주인의 뜻과 다르게 움직인다.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예수를 버린 것이다. 진리와 생명과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목숨과 권력을 위해서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마21.8-11)
↔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22b,23b)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5)
군중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이용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또한 악질이다. 어떻게 무리를 권하는가(20): “‘바라바를 달라 …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급기야 저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더욱 소리를 지른다(22b,23b).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결국 하지 않아야 할 무서운 말을 토해낸 것에 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5) 예루살렘은 이처럼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다(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23.37-39)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고 계신다.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따라 일하신다.
과연 나는 그때 어떤 사람으로 있었는가.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인가. 지금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나를 알고 내게 맡겨진 달란트를 통해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세워지고 있는가.
제2의 빌라도로 살아가는 헛된 가짜 믿음의 길을 멈추어야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내게 주신 재능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빌라도처럼 사용하고 있다면 곧 언젠가 타이타닉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다. 빌라도처럼은 성공이 아니고 파선이다.
이것이 고난받는 그리스도가 보여주시는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