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2수요 | 시123.1-4
기도, 하나님 쪽으로 걷다.
1 나 -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하나님 – 바라보며 …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4 우리 - 심한 멸시가 …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
교만한 자의 멸시
나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성전에 올라가는 나, 그는 지금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라며 성전에 올라간다. 이때 그는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부르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손에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2)라는 기도가 들려있다. 그는 이미 ‘우리’(공동체, 교회)의 형편과 고통을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는 길이 하나님께 있음을 또한 알고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기도의 공공성이다.
기도하는 나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를 품는다. 하나는 그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함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드리는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기도가 시작된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우리)의 실력으로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가고, 해결하려는 자에게는 시작되지도 일어나지도 않는다. 따라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동일시된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는 우리
시인은 자신과 ‘심한 멸시’(3)를 당하는 우리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종종 기도자는 자기의 요구와 급함을 우선한 나머지 오직 자기 자신만을 기도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을 선택한다. 아직 자신을 넘어서 옆까지를 보며, 우리의 고통과 탄식과 절망과 눈물과 아픔을 헤아리고 보듬고 싸매어주고 치유하고 공감하는 수준(용량)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럴 경우 대부분의 기도는 오직 나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도와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우리’를 품는다. 아니 자신까지를 우리의 아픔과 눈물 안에 포함시킨다. 동일시다. 너의 눈물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그래서 그것을 지금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아간다. 이것이 중보기도다.
조소(비웃음)과 멸시가 터져 나올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시인은 우리를 멸시하며 조소하는 교만한 자의 언행을 오직 기도로 받아낸다. 오로지 성전에 올라가며, 하나님께 호소한다. 전방위적으로 공격해 오는 문제는 내가(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다. 그렇다면 이 사이에서 과연 누가, 그리고 어떻게 이처럼 심한 멸시와 조소에 둘러쌓인 우리(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어지도록 하는 길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