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0주일 | 롬4.1-12
하나님의 사랑(3): 아브라함
∎롬1.17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인간의 죄악 … 하나님의 진노(1.18- )
*율법 … 행위 - ‘율법의 행위로 …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3.20)
→ *3.21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예증(4장) - 아브라함
∎롬8.39 |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계속해서 로마서 1장 17절과 8장 38-39절 사이에 서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바로 그 일을 살피는 중이다. 그 가운데 이번에는 로마서 4장에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로마서가 말하고자 하는 복음에 접근해 보기 위함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그러니까 ‘의롭다 하심’이라는 칭의가 아브라함 자신의 공로나 행위로부터 난 것인가, 아니면 칭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인가를 아브라함을 통해 구체적으로 예증한다(2). 왜 그럴까요: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아니라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공로와 행위가 없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로마서 4장이고,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이유다.
아브라함 새 관점: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은 의롭다 여겨주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다(2).
*칭의稱義)를 행위라는 의식(할례)에 의존하지 않으셨다(2).
*인간을 의롭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3).
*아브라함의 칭의(稱義)를 그가 일한 삯(빚)으로가 아니라 은혜(복)로 주셨다(5).
*칭의(稱義)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5).
*공로가 없어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5).
*경건하지 않아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5).
아브라함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왜 자기 스스로를 자랑할 수 없는 사람인가? 이 질문은 의롭다 하시는 것은 율법을 지켜 행하는 아브라함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다.
둘째는,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무슨 의미가 있는 행위인가? 이것 역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아브라함 자신의 행위가 그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창세기의 도움을 받아보자.
A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
B “아브라함이 그 포피를 벤 때는 99세였고.”(창17.24)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B)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A)를 인친 것이니.”(11a)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인생과 신앙 여정이라는 그의 시간표는 A → B로 이어진다는 점이다(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아무리 행위(할례, B)가 그 사람의 강력한 무기라고 하더라도 신앙의 역사(A), 그러니까 구원의 서정은 결코 B에서 출발하여 A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아브라함만이 그런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복음이다.
행위구원론: 나의 영적 상태에 따라 구원이 요동치게 한다.
예를 들어보자. 혹여 만에 하나 불의하고 악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지옥 편에서 아직 천국 쪽으로 이동하지 않았을 때 주님이 오시거나 갑자기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나는 꼼짝없이 끝장이다. 더는 노력하고 애쓸 기회나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공로와 행위에 의존적일 때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하나님까지 비난하며 시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내가 의롭다고 할 행위가 없는 상태일 때에 오셨느냐는 불공평(불합리, 불공정)이라는 문제 때문이다. OOO에게는 천국에 갈 행위일 때 오시고, OOO에게는 지옥에 갈 처지에 있을 때 오시면 그것만큼 불의(不義)한 것이 또 있겠는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구원이, 그러니까 인간에게 선언되는 의롭다 하심이 이처럼 인간의 상황과 형편이라는 행위에 맡겨진 것이라면 어디 불안해서 살 수 있겠는가. 나의 영적 형편(컨디션)에 따라 구원의 유무가 좌우될 정도로 상대적인 것이라면 그런 값싼 구원이 뭐 대단하기나 하겠는가.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짝을 이루는 이 믿음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믿음이라는 공로가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다는 얘기다. 아, 하나님이 이처럼 나를 구원하셨구나를 아는 것이지 그것을 알고 믿어서 구원이 시작된 게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얻은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한다.
이 귀한 말씀이 오늘 로마서 4장이 이야기하는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새롭게 자리하게 된 줄로 믿는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 구원의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지금도 이 구원을 풍성하게 하시는 성령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한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