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2주일 | 눅16.19-31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부자는 19절을, 거지 나사로는 20절을 따라 살았다. 먼저 부자는 자신의 인생 보고서가 20절의 나사로처럼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는 그림을 그렸다. 동시에 부자는 나사로의 인생 보고서에 관심이 없었다. 부자는 거지 나사로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았고, 전혀 이질적인 인생을 그리며 살았다. ‘죽어 장사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죽음 그 이후: 지옥과 천국이 있다.
하지만 부자와 나사로 이 두 사람은 22절에서 죽어 장사된 이후에 급반전된다: “거지가 죽어 … 부자도 죽어” 마침내 죽음은 이 두 사람의 인생을 갈라 놓았다. 먼저 부자와 나사로의 삶은 이생(현세)으로 끝이 아니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거지는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부자는 음부(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죽음 그 이후를 살아간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본문은 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그러니까 지옥과 천국에 들어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럼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일까. 초점은 이들의 죽음 이후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죽음은 필수다(22).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 물론 죽기 전에 부자처럼 사는가, 아니면 거지처럼 사는가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나 ‘지금 이후’, 그러니까 ‘죽음 이후’가 더 중요하다.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죽음 이후가 있기 때문이다(23).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어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 새로운 생활이 부자처럼 올 것인가, 아니면 거지처럼 임할 것인가.
거지에게도 죽음 이후는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거지가 아니다. 그의 죽음 이후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의 죽음 이후는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살고 있다.
오늘 말씀은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시간은 죽음 이후다. 그리고 장소는 나사로가 사는 천국이 보이는 부자가 고통 중에 있는 지옥이다. 먼저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 중에 말한다. 하지만 부자의 지옥에서의 소원(청원; 24,27-28,30)은 응답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죽음 이전에 해결했어야 할 것을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음부(지옥)에서 소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원들은 거절된다(24,27-28,30). 후반전이 끝날 무렵에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면 그 게임은 끝이다. 그런데 그 후에 골을 넣는다고 골이 인정되는가. 아니다. 지금 부자가 그러하다.
부자의 발견: 나의 죽음 이후는 지옥에서 사는 것이다.
부자는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지옥에서 비로소 알고 맛본다. 그는 지옥이 ‘고통 받는 곳’(28)임을 체험한다. 부자는 마침내 알게 된다: ‘지옥은 올만 한 곳이 못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부자는 이 사실을 지옥에 가서야 깨닫는다.
그랬다고 하더라도 지옥에서 아브라함의 품인 천국으로의 이동은 불가능하다(26). 그러니까 죽음 이후에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역시 죽음 이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갈 수 없다. 지옥에서 회개하고 새롭게 결심하고 돌이키면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옥에서 다시 죽음 이전의 상태(세상)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없다. 지옥은 다시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 간이역(연옥)이 아니다(눅23.43). 부자의 최종 목적지가 바로 지옥이다.
또한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24)라고 말하면서 지옥은 ‘고통 받는 곳’(28)이라고 말한다. 부자의 경험담에 따르면 지옥은 혀에 물 한 방울이 필요할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곳이다(24). 부자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지옥을 먼저 살면서, 그 지옥의 거주민이 된 체험을 우리에게 증언해 준다. 놀랍게도 이 고통은 일시적이거나, 그 끝이 있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지옥의 고통은 영원하다.
지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가는 곳이다(30):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자신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이 ‘회개’임을 이야기한다. 놀랍게도 부자는 죽기 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한 이 지식을 안다는 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 아닌가.
동시에 부자는 회개의 기회를 놓쳤다. 그는 죽음 이전에 이 땅에서 부자로 살 때, 구원의 진리를 듣고서 알았을 때, 바로 그때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였다. 그러나 이 회개의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지옥에서 회개한 것이 소용없는 이유다.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29; 우리말성경)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살아난다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31; 우리말성경)
*놀라운 질문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을 때에 ‘죽음 이후’를 준비할 수 있는가?
*더 놀라운 질문이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있는가?
*답은 이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에 죽음 이후를 준비할 수 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해답이 아니다(27-28,30). 해답은 29절과 31절이다. 죽음이 오기 전에, 지금 살아있는 시간에 복음을 듣고 죽음 이후를 준비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지금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지금이 구원 받을 때이고,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할 때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기회(선물, 은혜)는 이 세상에 살 동안에 듣고 믿어야 한다. 부자는 지옥에서 지옥을 떠날 수 있는 이러한 기회를 다시 한 번 더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부자는 이 세상에 살 때에 자신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요청을 전도자(설교자)들을 통해 들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지옥에 가서야 구원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것이다. 기회는 지옥에서, 더,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는 기회는 그가 살아있는 이 세상의 시간표 안에서 유효하다. 우리 양무리교회는 이 일을 추수감사주일에 주님께 올려드리려고 한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