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새벽 | 창41.17-36
바로의 꿈 이야기
[1] 꿈과 해석
요셉 이야기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 역시 요셉처럼 꿈을 꾼다. 하지만 저희는 꿈을 꾸지만 그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꾸고, 그 꿈을 해석하기까지다. 자신의 꿈은 물론 바로의 두 신하들의 꿈 둘과 바로의 두 꿈까지 모두 다다. 특별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꿈을 해석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사실 17세에 꾼 꿈이 자신의 인생을 곤두박질치게 했다면 13년의 고생살이에서 꿈을 저주하거나 가까이하지 않을 법도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인가. 요셉은 13년 전에 고향에서 꾼 꿈을 마음에 담고 지냈다는 것 아닌가(42.9a):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꾸게 하신 꿈을 어떤 상황에서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b)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25b)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28)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32)
요셉은 이번에도 바로의 꿈을 하나님과 연결한다.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는 놀라운 확신에 따른 이해와 해석이 아닐 수 없다(25b,32). 바로 <先 7년 풍년, 後 7년 흉년>이 바로가 꾼 꿈이라고 밝힌다. 애굽에서, 바로에게, 하나님이, 꿈을 통해 뭔가 일을 시작하신다고?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 놀라운 계획과 시간, 이 일이 요셉을 애굽에 종과 노예와 죄수로, 그것도 13년이라는 파란만장한 시간을 그렇게 묻어두시더니 급기야 이렇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시작하신다.
[2] 바로의 입에서 하나님이 고백되고 있음이 흥미롭다(38,39).
먼저는 신하들에게, 나중에는 요셉을 향해 하는 말에서다. 요셉은 大 바로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나님을 선포했다(41.16,25,32).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 모두는 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8b). 그런데 비천한 죄수, 그것도 애굽인도 아닌 히브리인이다. 가히 신들의 각축장이라 할 수 있는 애굽 바로의 궁전에서 듣도 보도 못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등장한 무명의 이방인(외국인, 야만인)의 거침없는 통찰력 앞에 애굽의 수장 바로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38)이라 칭한다. 더 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39)
이제 요셉의 꿈은 17년 전 헤브론(37.14)에서 시작되어, 애굽 보디발의 감옥을 지나 바로의 왕궁에 이르게 된다. 물론 요셉의 꿈은 아직 요셉의 심령에 심겨있다. 하지만 바로의 꿈이라는 옷을 입고 다시 애굽에서 자라갈 것이다.
어떻든 요셉은 고향 헤브론에서는 꿈을 꾸는 자였고, 지금 애굽에서는 꿈을 해석하는 자다. 아직 13년 전에 해석하듯이 11 형제와 부모까지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다르게 보이는 꿈이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인가. 마침내 꿈의 사람 요셉은 형들이 밀어넣은 웅덩이 → 애굽의 노예 → 보디발의 가정총무 → 바로의 궁전 → 애굽의 총리대신으로까지 뻣어간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애굽과 왕 바로를 통해 꿈이 이루어지게 하는 쪽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다. 애굽 왕 바로는 엉겁결에 거기에 화답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