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새벽 | 창42.1-17
요셉, 꾼 꿈을 생각하고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행7.12)
마침내 그날이 오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처음에는 희미하고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일어나고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일을 시작하시고 ‘때가 차매’ 그것을 드러내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고 긴 이야기의 섭리행전에서 볼 때 지금 고통스럽고,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끝난 것처럼 생각된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결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길고 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만남
과연 이런 일이 상상이라도 되었는가 말이다: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6b) 이렇게 해서 요셉의 꿈은 성취된다(37.5-11). 형들은 흉년 때문에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고, 총리 앞에 섰기에 그에게 절을 했던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를 요셉은 알고 있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8)
얼마 만에 다시 ‘생각’하는 꿈이던가: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9a) 17세에 꾼 꿈(37.5-11)이 그의 나이 38세에, 그러니까 21년 만에 성취된다(41.46,53, 45.6,11). 꿈을 꾼 때보다 그 꿈이 성취되기까지가 더 걸린 셈이다. 참으로 모질고, 험하고, 질퍽한 고난의 여정이었다. 사실 형들은 그 꿈의 가지 끝을 끊어버렸다.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 이루시려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모질고도 불신앙적이게도 잘라버린 것이다.
이쯤에서 요셉의 꿈은 죽었고, 끝이 났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고, 17세에 꾼 꿈이 무려 2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꿈’을 생각하였다(9a).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는 이 꿈을 꾼 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이 꿈이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이 미운 오리새끼처럼,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마구 뒹굴며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되는 것처럼 보이더라고 요셉은 한시도 이를 잊지 않았고, 의심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시작하신 꿈을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었다는 것 아닌가.
그러기에 ‘확실한 자들’(11)는 한 사람(야곱)의 아들들인 10 형제가 아니라 요셉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생 요셉을 죽이고 팔아버린 형들은 무려 21년 동안이나 자신들의 신실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다. 이들은 거짓말쟁이들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하나님을 거역한 패륜적인 사람들이다. 그것도 어떻게 동생을 인신매매 할 수 있단 말인가.
동생 요셉을 팔아넘긴 것은 완전범죄였다. 최소한 요셉의 나이 17세 때부터 지금 21년이 지난 시점까지는 말이다. 10 형제들은 그 시간 동안 아버지에게 누구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 무거운 죄의 짐을 가슴에 품고 이 기나긴 세월을 지내왔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어쩌면 가끔씩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는 날들을 맞을 때마다 영혼까지 아프고 시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이 모든 것을 퍼즐링하시기 시작하신다. 그런데 ‘기근’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이 기근은 요셉(37.7)과 하나님(15.13-16)의 꿈을 이루고, 마침내 10 형제들의 죄의 짐과 고통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때로 하나님은 기근이든, 오병이어든, 한 나드 향유 옥합이든, 지팡이든, 빈그릇이든, 물맷돌이든, 수금이든, 소금이든... 이런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