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새벽 | 창44.16-34
유다의 참회록
섭리의 조각구름(14-24)
유다와 그 형제들은 가나안(헤브론)으로 가던 길을 되돌려 다시 요셉 앞에 엎드린다(43.26 참조). 아마도 요셉은 자신의 나이 17세 때부터(37.2) 그의 나이 39세까지(41.46,53-54,42.1, 43.1-2, 45.6,11 참조), 그러니까 대략 22년 전에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자신을 향한 형들의 태도가(37.18-36) 바로 지금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베냐민을 향해서는 어떤지, 동시에 총리의 특별식(特別食, 43.34)과 은잔이 발견된 허물(12)에도 불구하고 베냐민에 대해 어떤 언행을 취할지를 보고자 했을 것이다.
지난 과거에는 속이던 형들이 지금 이번에는 자신에게 속아서 시험을 당하는 참으로 놀라운 시험을 통해 형들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게 한다. 이제 형들은 회개를 말로서만이 아닌 마음과 행동과 풀어가는 과정까지를 통해 22년 전과 달라져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만일 형제들은 지난 22년 전 요셉을 미워하여 팔아버렸던 때의 모습이라면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슬피 울며 죽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지금 여러 언행으로 보여준 것처럼 과거와 달라졌다면 요셉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맞다.
이에 유다는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16b)라고 고백하며 베냐민을 위한 중재에 나선다. 이젠 우리 모두가 다 죄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의 고백을 한다(16b). 베냐민만 종으로 삼겠다는 요셉의 말에 다시 온 몸으로 중재를 이어가는 유다의 언행에서 22년 전의 죄악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조각구름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유다의 참회록(25-34)
유다는 베냐민이 아버지 야곱에게로 되돌아가야 할 이유를 호소하듯 간청한다. 먼저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각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5-29). 또한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베냐민)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30a)어서 베냐민이 함께 귀향하지 못할 경우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아버지 야곱에 대한 사랑에 호소한다(30-31).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다는 베냐민만 종으로 삼겠다는 요셉의 말(10,17)에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고백한다(32-34). 유다는 베냐민을 내어 놓지 않고 자신을 기꺼이 값으로 지불하겠다 한다. 형제를 대신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자리까지 성장해 있다. 돌아보니 지난 22년은 요셉만 성장하고 성숙한 게 아니었다. 모두가 다 아픈 만큼 성숙해 있다. 죄를 알고(42.21), 가족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을 줄도 아는 자로 모두가 서 있다.
우리는 유다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형제, 교회, 성도, 가족)을 구하려 한 적이 있는가. 놀라운 것은 요셉의 나이 17세였을 때와 22년이 지난 때에 일어난 비슷한 상황에서(요셉의 편애 vs 베냐민의 편애) 야곱가의 형제들은 전혀 다른 언행을 하는 자로 성숙해 있다.
이제는 자신을 희생하며 형제들과 아버지를 위해 던지고 있고, 어려움을 당한 형제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어려움을 만나게 한 베냐민을 버리는 쪽을 선택하지 않았다. 요셉은 보았다. 지난 22년 전에는 자신을 죽기고자 했고 버렸던 동일한 그 형들이 이제는 서로를 지키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는 것에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단순히 형들이 절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22년 전, 그 아픔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 사이 모두들 실패와 좌절, 그리고 아픔과 절망의 세월들을 지나왔다. 애굽의 요셉만 그런 게 아니라 가나안(헤브론)의 가족들 역시 하나 같이 다들 고통의 세월을 품고서 모진 세월을 달려왔다. 그 속에서 조금씩 성숙해 갔고, 이제는 형제를 사랑하고 품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냥 요셉의 꿈만이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이제는 어디에 내어놓아도 쓰러지지 않을 강한 용사들로 준비되어 있었다. 마침내 애굽에서도 살아남아 마침내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어낼 자들로 준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