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주일 | 룻4.1-6
기업 무를 자(1): 아무개
4장으로 넘어오면서 룻기는 <고엘언약>을 지킬 자격이 있는 두 사람을 소개한다. ‘그 기업 무를 자’(‘아무개’)로 소개되는 익명(匿名)의 1순위자, 그리고 2순위자 보아스다. 과연 이 두 사람 중 누가 룻을 통해 나오미의 꺼져가는 가정을 다시 회복하는 ‘기업 무를 자’(redeemer)가 될 것인가? 이 둘이 서로 갈리는 이유(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이 4장 서두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이다. 먼저 다시 고엘(‘기업 무를 자’)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구약의 말씀(율법, 언약)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자.
레위기 25장으로 간다(레25.23-28): “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27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이 말씀(율법)에 의거해서 보아스 보다 ‘더 가까운 친족’(3.12)인 제1순위자 ‘아무개’가 권리를 행하기 위해 갑자기 마지막 장에 등장한다. 기업 무를 자와 관련하여 이 사람 ‘아무개’ 그는 어떤 사람인가.
1. 그는 단숨에 축복의 문에 서게 된다.
그는 보아스의 설명을 듣고서(3-4b) “내가 무르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5절의 부연 설명, 즉 구체적인 옵션을 듣고서는 그만 생각을 바꾸고 만다. 왜 그랬는가?
(1) “내가 무르리라”는 말이 나중에 취소된 것은 자신이 입게 될지도 모르는 ‘손해’ 때문이었다(6). 그런데 이방의 모압 여인 룻을 책임져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룻에게 자식이라도 생긴다면 자신은 엘리멜렉 → 나오미 → 룻 → 자식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허비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전혀 이득이 없는 거래라고 판단한 것이다.
(2) 나오미와 룻과 같은 약자들, 율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이웃들의 삶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생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문제나 형편, 고통이나 아픔은 전혀 고려조차 않았고, 오직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면 손해가 되느냐 하는 경제적은 숫자만을 생각했다. 그는 자기 것을 유지하기에 바빴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3) 그는 당장에는 손해가 아닌 이익처럼 보이는 편을 택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수준을 넘지 못한다. 사람들은 당장 좋아 보이는 것, 이익이 되는 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쪽으로 줄을 선다. 그러니까 ‘아무개’ 성도는 룻의 엑스트라(들러리)가 될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고엘찾기’의 주연이 되는 축복을 알지 못했다.
2. 영적 거듭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같다.
자기가 펄펄 살아있는 사람은 시작된 하나님의 복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모든 판단의 중심이오직 ‘자신’이다: “나는 … 나를 위하여 …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6) 지금 무엇이 ‘복’인지, 그리고 무엇이 ‘화’인지, 무엇이 진짜 손해이며 이득인지 분간을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1) 복을 발로 저 멀리 차 버리며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영적으로 득이 되는 자리인지, 아니면 큰 화가 임하는 자리인지 빨리 주파수를 맞추어야 한다. 내가 이 일을 이렇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통찰과 점검이 필요하다. 자신 생각에 ‘아니올시다’라고 그러면서 믿지 못하니까 그의 믿음대로 ‘아니올시다’로 끝나는 것이다.
(2) 노아시대 사람들을 보라. 120년 동안이나 하나님이 방주를 실물로 보여 주시면서 -마치 룻을 베들레헴 사람들 앞에 세우시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셨다. 거대한 방주가 그들 앞에 준비되어지고 있었다. 이제 구원의 방주에 오르기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했나요? 방주의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마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3) 교회가 있고, 사역이 있고, 봉사할 곳이 있고, 헌신할 대상이 있는데 오늘 우리 시대의 ‘기업 무를 자’인 많은 사람들 역시 ‘아무개’ 씨처럼 축복의 문턱에서 그만 뒤돌아서 버린다. 그에게는 상식과 지식과 돈의 시세 판단 능력은 있었는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율법의 도를 알고 믿는, 사사들이 치리하는 때를 율법을 성취하는 것으로 만들어 낼 영적 지혜는 없었다.
(4) ‘아무개’ 씨는 ‘신분’은 기업 무를 자 1순위자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결승전에 올라온 최종 후보가 될 수 있는지 어리둥절할 정도로 그 ‘수준’은 전혀 아니다. 신분은 그리스도인인데 수준이 세상 사람과 동일한 사람, 그래서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말씀을 붙잡고, 손해 볼 것 같으면 가차 없이 말씀(믿음, 신앙, 교회, 하나님)의 끈을 놓아 버리는 사람, 그가 바로 ‘아무개’ 씨의 후예들이다.
(5) 고엘제도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 정도로 ‘아무개’는 하나님의 법에는 정통하였다. 그런데 그런 그의 삶은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이해타산 적이다. 이런 그가 은혜에서 탈락하는 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 갈6.7)인 셈이다.
세상방정식 vs 하나님의 나라
인생은 언제나 두 지평 안에서 살아간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양분된다. 세상은 언제나 자기처럼 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해 보이도록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들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복을 1순위로 받을 수 있었던 ‘그 기업 무를 자’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눈으로 보고, 또한 생각해서 판단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선택한 수준이다. 당장은 좋아 보였으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몰랐다. 그는 처음되었으나 나중 된 사람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무개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영에 속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 사람은 축복을 피해 다닌다. 영적으로 눈먼 소경이다. 믿음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