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새벽 | 눅18.15-30
큰 부자 관리의 딜레마
어떤 관리 - ‘내가 무엇을 하여야’(18)
→ 듣는 자들 - ‘그런즉 누가 구원을’(26)
→ 베드로 -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28)
듣는 자들의 질문
어떤 관리와 예수님 사이의 첫 질문과 대답에서는 [무엇을+계명=영생]이라는 법칙이 만들어진다(18-20). 부자는 예수님의 영생법칙(永生法則)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20)을 풀려면 다음과 같은 공식이 만들어진다: 무엇을(18)+(계명+22절)=영생(“나를 좇으라!)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어떤 관리는 22절을 자신의 ‘어떻게’에 연결하는 것을 포기한다.
율법에서 복음으로 나아올 수 있는, 옛 법칙에 의해서는 영생의 문제를 풀 수 없음을,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새 법칙인 복음을 따라 살기로 결정해야 했음에도 이 부자는 다시 껍질 안으로 도피해 버린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자기의 공식으로 풀려고 만 한,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우문(愚問, 18)에 대한 현답(賢答, 22)이 왔음에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그만 오던 길을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23).
예수님의 답변
부자는 율법 준수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소위 ‘관원육경’(모세오경+1) 쯤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만으로도 영생의 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24)와 관련하여 계명(율법)만으로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22a)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주목한다.
물론 이처럼 계명(율법)+22절을 살아가는 것이 원인이 되어 영생,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라는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22절 하반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2c)는 제자도(Discipleship)는 이미 이 세상의 소유나 물질로부터 초연(자유)할 것을 전제한다. 이것은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 얻은 자의 마땅한 삶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다.
이때 듣는 자들의 질문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 이제 청중들은 혼란에 빠졌다. 때문에 ‘내가 무엇을’(18)에서 ‘그런즉 누가’(26)로 바뀐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아무도 그 주도권을 주장하거나, 인간적인 어떤 수단들을 동원하여 -그것이 율법(계명)을 준수하는 것일지라도- 인간 스스로의 힘이나 노력을 통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명백한 결론 앞에 모두가 다 서 있다(26).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물에 빠진 자가 자기 머리를 잡아 올린다고 건져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이 어찌 스스로의 노력과 힘을 수단 삼아 구원을 얻어낼 수 없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부자는 율법을 의지하여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기 것을 나눠 주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것들을 포기할 때 하나님은 내세(영생)는 물론 금세(今世)에서도 하나님의 부요함을 누리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