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새벽 | 눅21.5-19
종말의 법칙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5-9)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6, 19.44a)질 것이라는 예언은 불과 한 세대가 지난 후에 그대로 성취된다(AD 70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 그러나 이것이 곧 종말인가(6). 주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8-9). 그러나 이것이 곧 종말(‘끝’)은 아니며, “어느 때에 … 무슨 징조가”(7)에 대해 주님이 그리시고 또한 기대하시는 큰 그림이다. 그래서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8a) 말씀하신다. 더 명쾌한 것은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이 곧 되지 아니”라는 점이다(9b). 그럼 ‘끝’(종말)이다고, 혹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미혹을 받을 만큼 그것에 앞서 예고해 주신 것들은 무엇인가.
먼저 내적으로는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 거짓(적) 그리스도의 출현과(8), 동시에 외적으로는 “난리와 소요의 소문”(9a)이 처처에서 들려오는 일이 ‘끝’에 앞서 먼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징조를 보고서 이를 잘못 가르치는 자들이, 그것도 자신이 그리스도라 말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미혹한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한편, 일단 본문의 문맥상으로는 예루살렘 멸망(성전 파괴)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9b)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또한 먼저 있어야 할 것은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난리와 소란의 소용돌이다(8-9a). 결국 ‘끝’에 앞서 먼저 있어야 것은 분명해진 셈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과 끝은 분명히 다르지만 그러나 긴장 속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종말론적 핍박 예고(10-19)
종말은 곧 핍박과 매우 유기적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마지막에 될 일들의 순서가 있다(“이 모든 일 전에”, 12a). 먼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12a) 온갖 핍박과 환난과 고통이 있는데(12) 심지어 순교하는 일까지(16),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17)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말론적 핍박의 와중에도(12,16-17), 그러니까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9b)한 때에도 모두가 다 미혹을 받아 부끄러운 모습으로 종말을 맞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큰 위로이자 희망이다(13,18).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지키시며 보호하신다. 따라서 문제는 종말론적 핍박이 아니라 증인으로(13),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은 자로(18) 당당하게 ‘이미 종말과 아직 재림’ 그 사이를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더 심각하게 되물어야 할 질문이다.
사실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8b)고 주장하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핍박하는 자들이 있고(12),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들이(16) 함께 공존하는 것이 종말이라는 ‘때’와 ‘징조’, 그리고 ‘먼저’와 ‘끝’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점이지만 말이다. 이제야 24절의 말씀이, 즉 종말론적 핍박의 때에도 인내로 영혼(목숨)을 얻는 자들이 복되다(24)는 말씀이 희미하게나마 이해되는 것 같다. 정말 이제는 더욱 내가 꿈꾸며 이루어야 할 종말을 살아감, 그 파도 앞에 주님 말씀을 품고 당당하게 설 수 있으리라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