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8새벽 | 눅22.54-71
베드로(54-62): 예수님을 부인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베드로처럼 언행(言行)이 다른 자로 살아가고 있기에 이 장면은 대단히 멋쩍을 수 밖에 없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33)는 호언장담(好言壯談)에 주님은 ‘글쎄다!’(34)로 대답하셨다. 과연 베드로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까.
주님은 죄인의 몸으로 취급을 당하시면서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가셨고, 베드로는 그 뒤를 ‘멀찍이’ 따라간다(54). ‘불’과 ‘닭울음’ 소리가 묘한 느낌을 주는 것은 왤까. 베드로는 불을 피워 놓은 자리에 앉아 있다. 이 그림은 그대로 부활 후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주님이 피워 놓으신 ‘숯불’(요21.9)과 오버랩(overlap) 된다. 베드로는 불빛을 향해 앉은 자리에서 주님을 부인했고, 후에 주님은 불 앞에서 베드로와 함께 조반을 드신다.
그럼 베드로는 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까. 무슨 이유 때문에 ‘멀찍이’ 주님 뒤를 따라가서 벼락을 맞을까. 처음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쫓았다(5.11). 그리고 그는 제자훈련 중에 이처럼 자신의 신앙을 간증했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9.20b) 또한 주님이 체포되시던 바로 전에는 호언장담을 하고(33), 체포되실 때에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리”(요18.10)기까지 했었다. 그런 그가 몇 사람의 증인들의 말을 정면으로 부인(“저주하며 맹세”, 마26.74)해 버린다.
주님은 “너는 돌이킨 후에”를 기약해 주시기까지 하셨음에도 그는 주님과는 아무런 사이가 아님을 공개적으로 선언해 버린다. 이런 씻을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한 것, 이것이 베드로의 초라한 이력서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며(요13.1) 신뢰하시며, 추락 이후에 시작될 그의 새로운 인생설계도를 그에게 선물로 주신다(31-32).
그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하였을 때 “닭이 곧 울더라.”(60b) 그러자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61a), 그때에 베드로는 주의 말씀이 생각났다(34,61). 그래서 그는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62).
하지만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역시 수 없이 주님을 배반하고 다시 회개하고, 회개하고 다시 배반하고, 이런 돌림노래의 후렴을 우리 인생의 악보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우리 역시 파산하는 것은 아닌지 슬슬 겁나는 게 사실이다. 이쯤 해서 이런 성인아이의 어리광은 버릴 때도 되었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마26.74a)하였다. 이 일 후에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였고(62, 마27.75), 유다는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 도로 갖다 주며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3-4a)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마27.4b)
어찌된 게 우리는 언제나 베드로 쪽에 서 있다. 베드로를 돌아보시던 바로 그 눈으로 “주께서 돌이켜” 우리를 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