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새벽 | 눅23.1-12
빌라도와 헤롯의 심문을 받다.
재판 과정
안나스(요18.12-14)
→ 산헤드린 공회(22.66-71)
→ 빌라도(23.1-7)
→ 헤롯 안디바(23.8-12)
→ 빌라도(23.13-25)
빌라도(1-7) vs 무리들
무리(그들)들은 한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이처럼 목숨 걸지만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22.22a) 가는 일을 정확하게 성취하게 하는 자들에 불과하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죽겠다!”(9.22,43-45, 13.33, 17.25, 18.31-34 → 19.28- )며 예루살렘으로 오신 주님을 죽이겠다고 아우성치는 무리들의 몰골이다.
그들(무리)이 거론해야 할 죄목은 다름 아닌 신성모독죄(神性冒瀆罪, 22.67-71)였지만 그러나 저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주님을 고소한다(2,5,14).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결국은 자신들의 뜻을 이룬다. 하나님까지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 더 이상 무슨 희망이 있으리요. 인간이 자기 논리(목적)를 정당화하면 무슨 짓을 못할까.
헤 롯(8-12)
헤롯은 예수님을 단지 자신을 즐겁게 해 주는 흥미꺼리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이미 예수 이야기를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듣고 있었다. 그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는 자기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고(8.3),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안디옥교회의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그렇다(행13.1). 하지만 그는 이를 통해 믿음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실패하였으며, 기회가 되면 자기 눈으로도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8b) 하는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한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적이 있었지만(13.31b) 가까이에서 만나보니까 만만하게 보였을까. 헤롯 역시 무리들의 편에 서서 주님을 대적한다(11). 이제 그는 주님과는 완전히 멀어지고 악인과는 친구가 된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12)
빌라도는 주님이 무죄(無罪)함을 거듭 주장하면서도 ‘소리’(여론)에 굴복하고, 헤롯은 주님의 고난을 마당놀이 공연쯤으로 생각하였고, 종교 지도자들이나 백성들 역시 그랬다. 하지만 모두가 다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할지라도 주님만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다.
어떻게 된 게 무리(방청석)가 빌라도(재판장)를 이기느냐는 점이다: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24) 이렇듯 빌라도는 재판장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나 도덕도 찾아볼(기대할) 수 없는 비열한 사람이다(4,14b,15b,20,22). 따라서 이 재판은 처음부터 합법적이거나 순리대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정작 죽이겠다는 자들은 조급하고, 그러면서도 주저하며 혼돈스러운 ‘소리’만 있다. 반면에 주님은 ‘침묵’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