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새벽 | 출5.1-21
첫 탐색전 - 모세 vs 바로
바로의 저항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비웃음을 치며, 모세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9)이라 폄하해 버린다. 살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은 가중되는 노역 때문에 모세를 불신하기에 이른다(10-21; 참고. 4.31).
애굽의 바로(1-9)
바로가 어떤 사람인가가 여실히 드러난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2) 이 일로 해서 이스라엘의 노예생활은 더 무겁게 되었다(7-9). 바로가 의도한 것은 이스라엘이 모세가 말하는 것이 ‘거짓말’(9)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모세와 바로의 대결은 하나님과 애굽 신의 싸움이다. 그런데 지금 이 영적 전쟁이 애굽 신의 우위로 첫 전초전이 마무리된 듯하다. 그러나 배수진을 친 바로의 해법이 고작 고통을 더 가중시키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직시(통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이런 영적 통찰이 없다. 그러니 두려워하고 바로의 처분만을 의지할 뿐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10-21)
하나님이 개입하셨으나 어찌 된 것이 일은 되는 게 없다. 오히려 더 불행하고 고통스러워질 뿐이다(10-14). 백성들은 바로에게서 듣고 싶어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왕은 어찌하여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15) 그리고 그에게서 듣게 된 대답은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17)는 것 때문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좀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니까 모세를 원망하는 것으로 일차적인 반응을 보인다(20-21). 상황을 인식하는 눈, 사건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실력, 바로의 정체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영성이 없다보니까 단지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좌충우돌한다.
이스라엘은 단지 자신들에게 닥친 고통의 짐만이 사태를 바라보는 유일한 잣대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길가에 있다 … 바위 위에 있다 …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눅8.12-14)는 인간 심성의 밭처럼 지금 이스라엘이 그 꼴이다. 이미 모세를 통해서 들은 하나님의 出애굽 메시지가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4.27-31), 이게 결정적인 문제다.
바로는 이스라엘에 대해 철저하게 냉혹하다. 하나님을 향한 냉소주의(2)가 판을 치는 애굽에게 뭘 기대할 수 있을까. 도대체 출구가 보이질 않는다.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셨음에도 누구 하나 그걸 믿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바로를 이길 자는 누구인가. 이스라엘, 혹은 모세인가. 아니다. 하나님 외에는 바로와의 싸움을 승전(勝戰)으로 마무리할 자 아무도 없다.
이스라엘은 말씀대로 나갔다(1).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다음이 문제다. 과연 이스라엘은 이 결과 앞에 어떤 논리를 개발할까.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기보다는 세상을 향해 “왕은 어찌하여 …?”(15), 그리고 모세를 향해서는 “너희가 우리로 … 그들의 손에 … 죽이게 하는도다.”(21)라는 흘러간 옛노래를 반복하고 있다.
세상(바로)는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한다. 이게 세상이다. 하지만 이 망령된 생각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에서 어찌될까. 이것이 하나님(모세) vs 세상(바로)의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