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598주일 | 여리고①: 또 하나의 여리고성(수6.1)

598주일 | 6.1

여리고: 또 하나의 여리고성

 

가나안은 지금에서야, 왜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는가? 왜 어제는 두려워하지 않더니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는 오늘에 와서야 두려워 정신을 잃을 정도로 패닉에 빠질까. 지난 이야기에서 그 이유가 드러난다.

먼저 지난 광야시대에 대한 가나안의 반응이다. 29-11이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을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또한 정탐꾼들의 지금 현재의 가나안에 대한 보고다(2.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가나안 족속들이 오늘 보여준 반응이다(5.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마침내 지금 가나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앞에 떨고 있다.

, 이미 가나안 백성들은, 그러니까 여리고는 복음을 들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고 있다. 이것은 이미 한 가정에 가족(, 며느리, 아버지)을 통해 복음이 들어간 것과 같다. 하지만 시댁(친정)은 아직 먼저 복음을 들은 가족들로 말미암아 그 가정은 <교회금지령>으로 굳게 복음에 반대하고 있다. 이것이 가나안의 영적 분위기다. 그렇다면 세상이 복음에 대해 이처럼 거부하고 있을 때 복음은 어떻게 그 땅과 백성들을 정복해 가는가. 이것이 여호수아 6장에서 지금 우리가 들어야 할 복음이다.

 

[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1a)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손이 과연 누구이기에 여리고 백성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는가? 세상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한다. 언약궤를 앞세우고(3.3,8,13 3.14-16)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쳤다(4.1). 언약궤는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이며,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증표(sign)이다. 이것만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여리고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이스라엘을 건네셨음을 듣고마음이 녹았고정신을 잃었더라’”(5.1)고 성경은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서 역사 하시는 것을 친히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 없는 가나안의 백성들의 떠는 모습을 보라. 여리고 백성들이 두려워 한 것은 보이는 언약궤나 이스라엘 백성들이기 이전에 이 일을 이루신 하나님이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동시에 그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이스라엘을 두려워한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1a)

그렇다.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들어내는 증인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 세상이 나를 보면서 동시에 내 안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보도록 해야 한다. 만약 이 사실을 망각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나의 존재 목적이 아직 성취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정작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가 상대해야 할,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수도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

(교회, 우리 가정, )

 

[2]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1b)

 

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움츠러든다. 세상은 늘 이처럼 하나님, 진리, 교회, 그리스도인을 거부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능력에 따라 살아가자 여리고는 그것만큼 패배자의 모습으로 주저 앉아 버리고 만다.

 

여리고, 하나님을 거부하다.

세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성문을 여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자기를 버려야, 자기를 포기해야, 자기가 결국은 멸망해야, 없어져야 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죄라는 자존심이 이러한 진리를 끝까지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이게 세상이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교제하며 살아가지 못하고 죄의 높은 성을 쌓고 그 안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들 그 누구와도 삶으로 부딪히지 않는다. 자기라는 성을 높이 쌓고 그 안에서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다른 양식에 불과하다.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지키며, 믿으며, 이를 행하며 산다. 할례를 행하는 것이 그것이고, 유월절을 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이 앞서 군사령관으로 정복전쟁에 친히 참여하신다.

[1] 여기에 대한 세상 곧 가나안 7족족들의 반응을 보라. 어떤가. 긍정적이지 않다: ‘하나님께 항복하는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무릎을 꿇는가. 하나님을 인정하는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가.’ 답은 무엇인가. 전혀 아니다.

[2] 이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나안 7족속들 곧 세상의 반응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라. 어떤가: 실망인가. 분노인가. 아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6장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께서 명하신 말씀을 따라 묵묵히 가나안 정복을 향해 걸어간다. 세상의 악과 죄에 타협하거나 그것에 물들지 않는다. 하나님이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신 사명 쪽으로 가나안을 향해 진군해 들어간다.

기적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에서 시작되고 완성된 게 아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하루 1바퀴씩, 그리고 7일째 되는 날에는 7바퀴를 조용하게 말 없이 돌아라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 들고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바로 그 날부터 기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기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날마다의 일상생활이 날마다 기적인 셈이다. 죄인이어서 죽은 자가 있으나 죄인인데 용서 받아 새롭게 살아가는 죄인이 있다. 이게 기적이다.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가 있으나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는 의인된 죄인이 있다. 이게 기적이다.

똑같이 여리고에 있다. 여리고 백성들은 성안에 있고, 이스라엘은 성밖에 있다. 그런데 성이 무너지자 성안에 여리고 백성들은 다 죽어가고, 성밖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살아서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 놀랍지 않은가. 동일한 현장이 있었다. 그런데 누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살고(유월하고), 누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죽은다. 놀랍다. 바로 이것이 기적이다. 기적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에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또 하나의 여리고성은 지금도 존재한다. 하나님을 막으면서까지, 거부하고 대적하면서까지 하나님 없는 거대한 성을 쌓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저들을 정복하게 하신다. 누가 정복하는가.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정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룩한 영적 전쟁을 치르는 영적 군사로 이 세상 앞에 사야 할 교회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바로 . COVID-19라는 것을 이용해 기독교를 거부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여리고성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이스라엘 자손인 거룩한 성도들이다. 이 믿음으로 여리고를 향해 믿음의 발을 내딛는다

세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라!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다. 여호수아 6장은 이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결국 정복은 여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군사력과 전쟁의 전술에 달려있지 않다. 그럼 무엇인가. 정복은 이스라엘의 문제, 즉 교회와 우리의 믿음의 문제다. 여리고는 여리고 스스로 자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에 밀려 멸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이자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제목 날짜
612주일 | 아버지 다윗, 하지만 하나님이여!(시3.1-8) 2021.05.09
611새벽 | 지혜살이를 허무는 여우를 조심하라(잠2.13-22). 2021.05.04
610새벽 | 지혜살이가 답이다(잠2.1-12). 2021.05.04
609새벽 | 잠언의 책망: 듣고 돌이키라!(잠1.20-33) 2021.05.02
608주일 | 아이대첩①: 왜 패배인가?(수7.1-9) 2021.05.02
606새벽 | 가나안 스타트(출13.1-22) 2021.04.28
605새벽 | 출애굽.EXODUS(출12.37-51) 2021.04.27
604새벽 | 첫번째 유월절.逾越節.Passover(출12.21-28) 2021.04.26
603주일 | 여리고③: 라합 이야기(수6.22-27) 2021.04.25
601새벽 | 재앙⑦ - 우 박(출9.13-35) 2021.04.21
600새벽 | 재앙⑤⑥ - 악질과 독종(출9.1-12) 2021.04.20
599새벽 | 재앙④ - 파 리(출8.16-32) 2021.04.19
598주일 | 여리고①: 또 하나의 여리고성(수6.1) 2021.04.18
597새벽 | 하프타임.HalfTime: 격려 & 숨고르기(출6.28-7.7) 2021.04.15
596새벽 | 언약(言約)이 해법이다(출6.1-13). 2021.04.14
595새벽 | 첫 탐색전 - 모세 vs 바로(출5.1-21) 2021.04.13
594주일 | 요단 그 이후: 하나님이 하신다(수5.1-15). 2021.04.11
592새벽 | 이스라엘 - 350년 애굽史(출1.1-22) 2021.04.06
591새벽 | 40日 부활행전.復活行傳(눅24.36-53) 2021.04.05
590새벽 | 엠마오 페스티발(눅24.13-35) 2021.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