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새벽 | 출9.1-12
재앙⑤⑥ - 악질과 독종
재앙은 점차 바로의 심장부를 향한다. 마침내 재산상의 피해에(1-7), 그리고 급기야 사람을 겨냥하는 쪽으로 급속히 이동한다(8-12).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과 애굽의 고통을 방관하는 바로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 인상적이다(3,6a,9-10 ↔ 4,6b-7a).
다섯째 재앙 - 악 질(1-7)
여섯째 재앙 - 독 종(8-12)
하나님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1b, 7.16, 8.1,20) 하신다. 하지만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때마다 재앙의 강도는 점차 강해지며, 동시에 재앙의 방향은 바로의 모든 것을 무력화하고, 그럼으로써 재앙의 원 목적인 하나님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일이 점점 확장된다(6.7, 7.5,17, 8.10,22). 이게 다 바로의 자업자득(自業自得, 5.2, 갈6.7)이다.
인간 바로는 벌써 다섯(여섯)번이나 경험했음에도 살 길이 아닌 죽음의 길로 스스로 자맥질을 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조신(人造神)의 초라함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내 백성과 네 백성’(8.23)을 구별하신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4a)하신다. 애굽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거주지인 고센의 전후좌우(前後左右)의 모든 생축들이 다 죽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바로의 강퍅함은 꺾이지 않는다. 애굽 온 땅과 고센의 차이를 보고 있음에도 말이다(7a,11).
다신론과 범신론에 기초한 애굽이었기에 가축들을 신(神)으로 섬기는 일은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볼품 없는 것인가를 드러낼 뿐이었다. 무능력한 신, 죽어가면서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신, 왜 죽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신, 이것이 애굽이 의지하는 신들의 민낮이자 허상이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음에도(7,12), 그걸 친히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 줄 모르고서 시작했다면 일이 진행되면서 웬만하면 눈치를 챌 때도 되었는데 바로는 여전히 암흑이다. 어찌보면 그는 당대에 가장 성공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모든 것을 가졌고, 마음만 먹으면 하지 못할 일이 없는 절대권력의 핵이었다. 그런 그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점차 몰락하고 있다.
세상을 보면 바로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얻었고, 누리고, 가지고 있고, 행할 수 있는 힘이 역설적으로 그를 추락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런 보잘 것 없는 신기루와 같은 허망한 것들을 더 의지하고 붙든다. 그리고 그걸 눈치챘을 때는 이미 어찌 해 볼 수 없는 낭떠러지 앞일 경우가 허다하다.
바로나 되니까 이처럼 살았다고 생각하지 말자. 나도 어느 순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붙드는 순간 바로처럼 처참한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나 또한 별 수 없는 인간 가운데 한 사람이기에 그렇다. 하나님과 대결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바로에게서 생각해 본다. 이번에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12) 과연 바로는 어찌 될까. 혹 나 역시 그걸 알면서 바로처럼 얼굴을 들고서 일곱째 재앙 앞으로 걸어가는 것 아닌지, 바로에게서 나를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