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새벽 | 잠1.20-33
잠언의 책망: 듣고 돌이키라!
지혜가 전방위적으로, 그러니까 모든 상황에서 말을 걸어온다(20-21). 그런데 이것이 ‘의인화’(20-21) 되었기에 그렇다면 이 지혜가 설교를 하는 셈이다. 한편 ‘나’는 지혜인데, 특별히 23, 28절은 신적 존재로서의 지혜다. 그렇다면 지혜는 단순한 말이나 지식이 아닌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때문에 잠언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지혜의 탄식(22-23):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어리석은 자들은 …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22)
먼저 지혜는 어리석음을 책망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돌이키라 명한다. 지혜가 어리석음 때문에 탄식하는 중이다. 지혜가 심혈을 기울여 지혜의 ‘영’과 ‘말’을 보여주면서까지 어리석음이 미련하고 또 그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거만한 것인가를 드러낸다. 과연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를 받을 것인가.
어리석음(24-25): 지혜를 거절하다.
∙“내가 불렀으나 … 받지 아니하였은즉”(24-25)
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거절한다. 지혜를 듣기도 싫어하고, 지혜에 관심조차 보이는 자 없고(24), 오히려 지혜의 모든 교훈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지혜가 주는 책망도 거절한다(25).
어리석음의 결과(26-32): 지혜가 떠나다.
∙“그 때에 너희가 … 나를 만나지 못하히니”(28)
지혜를 버리고 그것으로부터 나가면 그야말로 ‘개고생’이다. 결국 재앙과 두려움의 광풍에 처하게 될 때 지혜로부터 비웃음 꺼리 밖에 되지 못한다(26).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을 기뻐하며 날뛸 때는 좋았을지 모르나 끝내 돌이킬 수 없는 근심과 슬픔이 임하고 말 뿐이다(27).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 업신여겼음이니라.”(30)
지혜를 버리고 어리석음을 따랐을 때 이미 예고된 재앙이다. 어리석음을 좋아하는 자들은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29), 더 적극적으로는 지혜의 교훈을 받지 않고, 어리석음을 책망하는 지혜의 교훈을 업신여기기까지 한다(30).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31)
어리석음의 결과다. 결국 이런 자기 행위의 길이 만들어낸 결과를 얻게 되지만, 그러나 이러한 자기 꾀의 결과에 포만감을 느끼는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무너지고 만다. 그 결과는 이처럼 참담하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32) 무엇인가. 죽음이요 멸망으로 끝이다. 지혜를 거부하고 그를 떠난 자의 최후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의 경고는 무엇인가. 33절이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생각보다 지혜는 간결하고 매우 순박하다. 지혜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어리석은 자의 결과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 아닌 것에서 답을 찾고, 지혜의 말을 듣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는다. 그 차이다. 그런데 이 미세한 차이가 지혜와 어리석음이라는 결과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