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2새벽 | 약2.14-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행위의 시점(時點)을 말하고 있다.
바 울(Paul)
①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행위의 시점이 구원받기 이전의 행위를 말한다.
② 구원의 근원으로서의 행위가 아님을 강조한다.
③ 구원의 원인으로서의 행위, 즉 구원을 위해 행위가 하는 역할은 없다.
④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라고 말할 때 강조점이 ‘구원받은’이다.
야고보(James)
①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행위의 시점이 구원받은 이후의 행위를 말한다.
② 진실한 믿음으로부터 나와야 할 행위를 강조한다.
③ 구원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행위, 즉 구원을 받은 자에게 행위는 당연하다.
④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라고 말할 때 강조점이 ‘이렇게 산다’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용하다(14-18).
믿음은 단순히 지식적 동의가 아니다(19-20).
믿음이 있다면 그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뒤따른다(14). 그렇지 않다면 그의 믿음은 결국 헛것이다(20). 야고보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생명 없는 죽은 신앙이다(15-17). 단순히 지식적 동의는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19, 마8.29, 눅4.34, 8.28). 진짜 믿음이라면 사탄이 쪼아대는 소리와는 달라야 한다.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18).
야고보는 여기서 구원을 받기 위한 행위를 말하고 있지 않다. 이미 믿음 안에 들어온 자가 그 구원을 어떻게 증거하며, 성취하며, 자신 안에 이루어진 구원을 드러내며 살 것인가를 말한다. 그러니까 구원 이후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 그 사람의 열매(행위)로 그를 안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진리요, 성경이 일관하게 선포하는 구원의 복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21-26).
역시 아브라함(21-24)과 라합(25)을 예로 들어서 구원에 있어서 행위와 믿음의 관계를 설명한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며,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22). 아브라함과 라합은 이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행적을 기록한 창세기는 물론, 신약 로마서 기자는 그의 일생의 흐름을 이렇게 말한다: 이신칭의(창15.6, 롬4.1-8) → 행위1(할례, 창17.23-27, 롬4.9-12) → 행위2(모리아산 헌신, 창22.9-14) 라합 역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이는 이러한 행위가 나올 수 없다(수6.25, 히11.31).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행위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거꾸로 말하지 않는다. 이들이 이처럼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구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야고보 역시 이를 고백한다. 그가 말한 행위는 이미 믿음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한다. 결코 믿음 없이, 믿음과 무관하게, 행위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이 생겼다는 그런 식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믿음이 얼마나 건강하고 바른 것인가를 이들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입증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