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4새벽 | 약3.13-18
참 신행(信行)은 위로부터 난 지혜로 말미암는다.
야고보는 행동하는 신앙생활을 외적으로는 말과 혀(3.1-12)에서, 그리고 내적으로는 지혜라는 좀 더 근본적인 것에서 찾는다. 그는 지혜를 크게 세상적인 지혜(13-16)와 하늘의 지혜(17-18)로 나눈다.
세상으로부터 난 지혜(14-16)
신행(信行)을 따라 복음 안에 들어온 성도들 가운데도 세상으로부터 난 지혜를 따라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있다는 야고보의 충고는 그냥 ‘맞다’하고 넘어가 버리기에는 아무래도 좀 그렇다. 교회는 세상의 지혜가 주장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람 냄새가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인간적인 제도, 세상방정식, 세속적인 가치관, 지위, 학벌, 재산, 그러니까 불가시적이든 가시적이든 간에 성경이 말하지 않은 그 어떠한 것들도 교회의 영적 리더쉽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시기와 다툼, 혼란, 모든 악한 일을 만드는 것 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15)이다. 그런데 이것들을 헛되이 자랑하고, 진리를 거스려 속이는 추악함이 ‘지혜’라는 이름으로, 가짜인데 진짜처럼 신행(信行)하는 것으로 교회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17-18)
신행(信行)은 말과 지혜로 드러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17a)다.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신행(信行)은 외적으로는 말(입, 혀)로 나타나고, 내적으로는 그 지혜로 말미암는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17절을 화평으로 심어 신행(信行)이라는 말과 지혜의 행함을 통해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화평케 하는 자다(18). 결국 교회의 건강은 화평케 하는 것으로 열매 맺는다. 이를 위해 신행(信行)이 말과 지혜와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것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무엇일까?(17)
성결이다.
화평이다.
관용이다.
양순이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
편견과 거짓(위선)이 없다.
이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를 따라 신행(信行)으로 말미암아 맺게 되는 ‘의의 열매’(18)다. 또한 화평하게 하는 자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야고보에게서 계속 놀라고 있다. 야고보가 ‘행함에 의한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이며 얄팍한, 그래서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닌 [행위구원론자]에 의해 인조(人造)된 지혜인가를 절감한다. 야고보의 ‘낙타무릎’이 이런 행위와 무관한 것이라는 점, 그것만큼 위로부터 내리는 것에 주목해야함을 도전하는 메아리로 우리 심령에 박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