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주일 | 마8.5-13
기도⑤: 백부장의 기도
백부장 -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예수님 -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산상수훈을 통해 기도에 대해 주신 말씀([1] 6.5-13, [2] 7.7-12)을 주목한다. 8장에서는 바로 이 기도의 말씀대로 기도한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이 말씀하는 기도를 실재 삶의 자리에서 맛보는 것, 이것을 가능케 하는 길이 보인다.
산상수훈의 기도(The Message)
[1] 마6.5-13
5 또 너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연극을 하지 마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다 스타가 되기를 꿈꾸며 기도할 때마다 쇼를 일삼는다! 하나님께서 극장 객석에 앉아 계시다는 말이냐? 6 너희는 이렇게 하여라. 하나님 앞에서 연극하고 싶은 유혹이 들지 않도록,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라. 할 수 있는 한 단순하고 솔직하게 그 자리에 있어라. 그러면 초점이 너희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지고, 그분의 은혜가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7 세상에는 이른바 기도의 용사들이 가득하나, 그들은 기도를 모른다. 그들은 공식과 프로그램과 비결을 잔뜩 가지고서, 너희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에게서 얻어 내는 방법들을 퍼뜨리고 있다. 그 허튼소리에 속지 마라. 8 너희가 상대하는 분은 너희 아버지이시며, 그분은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너희보다 더 잘 아신다. 그저 단순하게 기도하면 된다.
[2] 마7.7-12
7 하나님과 흥정하지 마라. 솔직하게 말씀드려라. 필요한 것을 구하여라. 8 우리는 쫓고 쫓기는 게임이나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9 너희 아이가 빵을 달라고 하는데, 톱밥을 주면서 아이를 속이겠느냐? 10 아이가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살아있는 뱀을 접시에 담아 아이에게 겁을 주겠느냐? 11 너희가 아무리 악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자기 자식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킨다. 그렇다면, 너희를 사랑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은 그보다 휠씬 낫지 않으시겠느냐? 12 여기, 간단하지만 유용한 행동 지침이 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지 자문해 보아라. 그리고 너희가 먼저 그들에게 그것을 해주어라. 하나님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설교를 다 합한 결론이 이것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기도하는 자신을 믿는 게 아니다. 기도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하시는 기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기도의 결과를 기도하는 사람이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며 기도하는 자를 경계하셨다.
주님은 백부장의 기도(고백)를 인정하셨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앞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 기도([1], [2])다. 그의 기도는 또한 주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다. 그의 믿음은 결코 화려하지도 않고, 큰소리도 아니며, 자기가 얼마나 큰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산상수훈의 기도에, 동시에 주님께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앞서 산상수훈에서 주께서 말씀하시는 기도와 일치한다. 그러니까 주님이 인정하시는 기도는 역시 주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다. 기도가 바른 믿음이 되고, 믿음이 바른 기도가 된다.
성경 어디에도 내가 믿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기도했기 때문에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가 이루어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산상수훈이나 기독교가 아니라 이방 종교에서 접근하는 방법론이다.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초점과 우선 순위가 바뀌면, 바로 그 순간부터 기도가 연극이나 쇼나 이벤트로 왜곡되고 변질되기 시작한다. 내가 원하고 필요로 한 것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일에 어떤 공로를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러니까 내가 기도의 능력이 역사한다는 생각을 갖는 순간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본질에서 이탈한다.
기도는 생각 보다 훨씬 단순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것이 기도이고, 그래서 ‘아멘!’하고서 그 말씀대로 단순하게 행하는 것이 기도다. 그리하면 그것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능력이나 애씀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둔 백부장은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그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그 믿음에서 기도를 한다. 백부장이 복된 것은 복음을 듣고, 그 다음에 그 복음을 믿고, 그리고 주님 앞으로 나아왔고, 그리고 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여 기도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기도를 자신이 아니라 죽어가는 하인을 위해 사용한다. 재미난 것은 중풍병에 걸린 하인이다(6). 그가 고침을 받는 것은 자기 주인인 백부장의 믿음에 의한 기도 때문이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13)
여기서 매우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나의 기도가 너의 문제를 해결한다. 동시에 나의 믿음이 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곳(가버나움, 믿음; 5)에서 기도하면 저곳(집, 응답; 6)에서 문제가 해결된다. 이곳에서 믿으면 저곳에서 문제가 해결되고 응답된다.”
백부장처럼 기도를 믿음으로, 믿음을 기도로 행하며 살자! 나 한 사람 바르게 믿으며 이를 기도로 이어가며 살면, 동시에 나 한 사람이 바르게 기도하며 이를 믿음으로 이어가며 살면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복을 받는다. 이것이 산상수훈이 말씀하는 기도이고 믿음이다([2] 7.12). 이렇게 살아야 한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을 받았다면 이제부터는 그 말씀대로 사는 믿음이고 기도여야 한다.
백부장은 주님의 복이 하인에게 흘러가게 한다. 축복의 통로가 된 셈이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10b)는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다. 기도로 이어지고 있고 아름다움 믿음의 향기가 아닐 수 없다.
모두가 다 자기라는 우상에 빠져 오직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살아가는, 더욱 믿음마저도 이처럼 세속적인 기도를 드리는 도구로 전락시킨 지 오래인 이 때에, 그러니까 기도마저도 이처럼 세속적인 믿음으로 전락시킨 지 오래인, 거기에 익숙해진 때를 살아간다. 그런데 바른 믿음도 단순한 기도도 찾아보기 어려운 때에 이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주님의 눈높이에 맞춘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것,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간증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