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기도회

1강: 마가복음 맥잡기

설교자
김충만 목사
설교일자
2019-05-08
성경본문
마가복음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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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 마가복음 맥잡기

 

마가복음 맥잡기

Mk. 10:45

구 조

종으로 오신 예수님(1:1-13)

섬기려 오신 예수님(1:14-8:26)

갈릴리 사역1(1:14-3:6)

갈릴리 사역2(3:7-6:6a)

갈릴리 밖 사역(6:6b-8:26)

고난 당하신 예수님(8:27-15:47)

예루살렘 노중 사역(8:27-10:52): 예고

예루살렘 사역(11:1-15:47): 십자가

승리하신 예수님(16:1-20)

 

이신 예수님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10:45)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처럼 베드로와 마가 역시 그러했다(벧전 5:13).

마가(Mark)는 마리아의 아들이자 바나바의 사촌으로(12:12, 4:10),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에 동행하던 중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고(13:13), 이것이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15:36-41). 그렇지만 후에 결국은 바울의 조력자가 되었다(4:10-11, 딤후 4:11, 24).

그는 주님이 하신 말씀보다는 그가 하신 에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기적이 20개나 소개된다. 그리고 이 모든 언행을 으로서 감당하셨음을 줄곧 강조한다. 아마도 마가는 주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섬기셨듯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 역시 주님처럼 섬기는 자로 살아갈 것을 말하고 싶어한 모양이다.

 

종의 오심(1:1-13)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1:11a)

 

하나님의 아들이 섬김을 위해 오셨다(1:1 10:45). 이를 마가(1:1), 이사야(1:3), 세례 요한(1:7), 성령님(1:10), 아버지 하나님(1:11)이 친히 증거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이를 세례(1:9)와 시험(1:12-13)을 통해 친히 확증하신다. 한편 주님은 이 땅에서 종으로 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登極)하신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섬겨주신 것이다. 이렇듯 그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으로 오신 분이시다.

 

종의 섬김(1:14-8:26)

갈릴리 초기 사역(1:14-3:6): 3중사역

 

가르치시매(1:21)

고치시며(1:34)

전도하시고(1:39) ... 전파(1:45)

    → 반응들

믿음(2:1-6):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a 거부타령(2:7-28): 바리새인들_ “어찌하여”(7,16,18,24)

    → 복음사역

        예수님_ ‘이르시되’(2:8,17,19,25, 3:3)

b 거부타령(3:1-6): 바리새인들_ “고발하여 어떻게 하여”(2,6)

 

갈릴리 후기 사역(3:7-6:6a)

   

갈릴리 밖에서의 사역(6:6b-8:26)

 

 

 종의 희생(8:27-15:47): 십자가

8:27-10:52 예루살렘을 향하여

11:1-13:37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14:1-15:47 수난, 죽음, 부활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5:34a)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30)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8:31-32a)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14:8)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14:24)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

 

주님은 섬김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셨고 희생으로 이를 확증하셨다. 갈릴리(1:16-8:21)와 예루살렘(11:1-15:39)에서 복음을 전파하심으로써 친히 종으로서의 섬김과 희생이라는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무서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4:40, 5:36, 6:50, 16:8). 이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4:13, 7:14,18, 8:17-21,32, 9:6,10,32,35-41, 14:37,40,50,68). 이처럼 천국 복음이 전파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죄 아래 놓여 있다.

그런 이 세상을 위해 주님은 오셨고 마침내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신다(8:22-26, 10:46-52). 이것이 마가가 놓치지 않고 주님이 하신 섬김을 추적하고 있는 핵심이다(10:45). 이 섬김은 죽음으로 정점에 달하고 부활과 승천으로 완성된다. 이는 곧 성육신의 신비다.

무엇보다 십자가를 통해 섬김이 성취될 것에 대해 주님은 마침내 여러 차례 말씀하신다(8:30-9:1 9:30-32 10:32-34). 이것은 제자들(베드로)이 비로소 주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시인하는 신앙고백 이후에야 공개된다(9:12, 14:8,24-25 참조). 마침내 종으로서의 섬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볼 때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확증된다. 그리고 이것은 곧바로 당신 자신의 희생으로만이 섬김을 성취한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마침내 이 섬김은 십자가에서 성취된다. 참으로 놀라운 희생이다.

 

[수난예고 구조]

A 8:22-26 기적(벳새다의 소경)

  X 8:27-10:45(수난예고 제자들의 반응)

    ① 8:31 32-33

    ② 9:31 33-34

    ③ 10:32-34 35-37,41

A' 10:46-52 기적(소경 바디매오)

 

하지만 수난예고 때마다 그 후에 보인 제자들의 반응은 놀라우리만큼 변함이 없었다(8:31 32-33, 9:31 33-34, 10:32-34 35-37,41).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저들의 못남을 제자훈련을 통해 새롭게 하시는 제자도에 열중하신다(8:34-37, 9:35-37, 10:38,42-45).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노중(路中, 8:27-10:52)에서 저들을 가르치시는 복음은 철저하게 역설적이다. 수난을 향한 예루살렘에로의 길이 점점 가까워올수록(8:27, 9:30,34, 10:1,17,32,46) 예수님과 제자들의 언행(言行) 역시 점차 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제자도]

1:16-20, 2:14               +부르심

3:13-19                      +선 택(12 제자)

  4:13,40                     -이야기1(무지와 불신)

6:7-13,30                    +파 송

  6:37,52                     -이야기2(오해)

  7:18                         -이야기3(무지)

  8:4,14-21,32               -이야기4(무지와 오해)

  8:29                         +신앙고백

8:34-38                       +제자훈련1

  9:5,10,14-29,32-34,38   -이야기5(무지와 믿음 없음)

9:35-37,39-50               +제자훈련2

  10:10,24-26,32,35-41    -이야기6(무지)

10:23-31,35-45             +제자훈련3

  14:33-42,50                -제자들의 나약함과 도망

  14:10,43-46                -가룟 유다의 배반

  14:54,66-72                -베드로의 부인

  16:14                        -꾸짖으심

16:15-18                      +지상명령

  16:20                        +제자들의 사역(“전파할새”)

 

당신이 종이셨듯이 제자들 역시 종으로 부르시사 그들을 12 제자로 선택하여 보내신다(1:16-20, 2:14 3:13-19 6:7-13). 하지만 제자들은 무지와 불신과 오해의 소용돌이에서 좀처럼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4:13,40, 6:37,52, 7:18, 8:4,14-21,32). 이에 주님은 좀 더 구체적으로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교육(훈련, 8:34-38 9:42-50 10:23-31,35-45) 하신다.

비록 이는 어찜이냐?”(1:27a, 6:2 참조)를 외치는 군중과는 다르게 저가 뉘기에 하는가?”(4:41)라 반응하는 제자들일지라도 저들은 아직 주님의 정체(identity)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6:52, 8:14-21). 이런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베드로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게 되고(8:29), 이 시점을 통과하면서 주님은 비로소 십자가의 길을 저들에게 가르치시고 훈련하시기 시작하신다.

먼저 제자들은 무리들 속에 있다(1:16-3:6). 하지만 점차 가르침을 받으며, 동시에 예수님의 종으로서의 사역을 통해 단순한 무리들과 달리 증인으로 구별된다(3:7-6:6). 그리고 마침내 군중들을 섬기는 자로 파송을 받음으로써(6:7-8:26) ‘사도로 세워진다(6:30). 물론 그럼에도 제자들의 영적 시야는 여전히 어둡기만 하다(6:52, 7:18, 8:14-21). 그러나 벳새다 소경을 치유하는 예수님의 기적은 바로 그 제자들에게 뭔가 깊은 암시(여운)로 다가온다(8:22-26). 이것은 이어지는 베드로의 고백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준다.

그럼에도 제자들의 휘청거림을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9:5,10,14-29,32-41 10:10,24-26,32, 35-41 14:10,33-42,43-46,50,54,66-72). 이렇듯 스승과 제자들의 숨 막히는 긴장이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는 저들을 향한 예수님의 기다림과 사랑이 알알이 박혀있다. 부활하신 이후까지도 제자다움은 요원해 보이지만(16:14, 15:39 참조), 그럼에도 주님은 저들에게 지상명령을 주시며 끝까지 신뢰하신다(16:15-18; 참조. 13:1). 그러자 마침내 제자들은 긴 기다림과 신뢰에 응답하기 시작한다(16:19-20).

 

 

종의 영광(16:1-20)

 

놀라지 말라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6)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19)

 

종의 영광은 십자가에서 자기 희생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신 섬김과 분리되지 않는다. 한편 마가는 오히려 이 영광마저도 섬김의 그늘 아래로 낮추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섬기신 종으로서의 주님에 대한 기록에 비하면 섬김이 가져다 준 영광에 대해서는 너무도 간결하게 기록(섬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영광의 하늘 우편 보좌에 등극하신 주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써 종의 영광은 항구적임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이 영광은 또 다시 제자들에게 위임된다(14-20).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실패하고 있음에도 말이다(9-14). 하지만 실패에서 승리로의 반전은 주님으로부터 온다. 이것이 섬김 안에 들어있는 섭리다. 이제 제자들 역시 주님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섬김과 희생의 반열에 들어선다. 이렇듯 예정된 영광을 향한 레이스는 이미 주님으로부터 들은 바 복음 안에 주어졌고(8:34-38, 10:29-31), 마침내 다시 주님에 의해 새롭게 격려된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희생과 섬김으로 주님 가신 그 뒤를 따르면 영광은 그의 몫이다. 이는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종의 복음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우리 또한 이와 같은 머슴’()으로 살기를, 이처럼 사용하여 주시기를, 이렇게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기를 기도한다.

영광의 16장에서마저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제자들이 위로(?)가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실패가 정당화될 순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실패 뒤에도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섬기는 주님이 눈물겹도록 그리운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다 복음이다.

 

 

부스러기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찬송가 1851)

 

섬김은 희생을 먹고 자라 마침내 영광으로 열매 맺는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으로서 감당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은 아무나 하는, 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래서 주님처럼 위로부터 오는 능력과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만 한다(1:1-13). 이것이 바른 출발이요 순서다. 그래야만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섬길 수 있고, 죽기까지 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광은 자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눈물로 씨를 뿌려야만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126:5-6). ‘섬김, ‘영광이다.

주님이 섬기시던 자리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하지만 종으로 섬겨 주심에도 불구하고 무례하게 언행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끝까지 종의 섬김과 희생을 완수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마가와 함께 따라가 본다. 이제는 내가 응답할 차례다. 주님이 만난 사람들에게서, 주님이 하는 말씀에서, 주님이 이루신 일에서 주님을 느끼고 깨달아 알고 싶다. 내 감히 주님이 이런저런 분이시다는 둥, 잘 하셨다는 둥, 이런 언행은 높이 살 만하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또 해설하는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으랴. 나의 못남을 아파하고, 어떻게 하면 주님처럼 복음과 교회와 말씀과 성도들을 섬기는 종으로 살 수 있을까를 묻고 찾고 두드리고 구해야 할 때다.

주님으로부터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마땅히 희생과 섬김으로 이 소명에 응답할 때다. 지금은 종으로 살 때다. 영광은 그 다음이다. 영광의 목록을 정리하려는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자.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가 만드는 영광이 아니기에 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섬김과 희생이다. 혹 그랬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영광의 자리에 내가 올라앉는 것 역시 아니다. 희생의 섬김을 조건으로 영광을 도적질하겠다는 가라지와 같은 못된 씨앗은 이제 내 영혼의 밭에 파종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주님처럼 섬기며 희생하며 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결별하기 위해 마가복음의 창 앞에 서 본다. 저만큼 섬김의 종이신 주님이 앞서 가신다. 이 간격을 조금이라도 좁혀보기 위해 묵상의 끈을 조여야 할 시간이다. 제자들이 비로소 주님이 친히 보여주신 섬김의 종으로 응답했듯이 동일한 주의 제자인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살아야 할 새 소명 앞에 선다. 이왕 할 일이라면 빨리 철들었으면 좋겠다.

 

20강: 바른 삶이 곧 참된 정결이다.

김충만 목사
20191023
막7.14-23

19강: 참된 정결을 생각한다(2).

김충만 목사
20191016
막7.1-13

18강: 참된 정결을 생각한다(1).

김충만 목사
20191009
막7.1-13

17강: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

김충만 목사
20190925
막6.45-56

16강: 영육(靈肉)의 양식

김충만 목사
20190918
막6.30-46

15강: 세례 요한의 죽음, 그 다음은?

김충만 목사
20190911
막6.14-29

14강: 예수님께 배척 당하는 게 더 비극이다.

김충만 목사
20190904
막6.1-13

13강: 믿음이란 무엇인가?

김충만 목사
20190828
막5.21-43

12강: 예수 쪽으로 걷는 사람인가?

김충만 목사
20190821
막5.1-20

11강: 다시 믿음을 생각한다.

김충만 목사
20190807
막4.35-41

10강: 천국이 비유 안에 보인다.

김충만 목사
20190724
막4.21-34

9강: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보라!

김충만 목사
20190710
막4.1-20

8강: 주님은 순풍(順風)을 일으키신다.

김충만 목사
20190703
막3.7-35

7강: 하나님의 나라를 거역하는 자들

김충만 목사
20190626
막2.18-3.6

6강: 복음의 역풍, 믿음으로 건너라.

김충만 목사
20190619
막2.1-12

5강: 갈릴리에 역풍(逆風)이 분다.

김충만 목사
20190612
막2.1-28

4강: 갈릴리에 복음의 파도가 일어난다.

김충만 목사
20190605
막1.14-45

3강: 예수님도 준비하신다.

김충만 목사
20190529
막1.1-13

2강: 마가복음 맥잡기(구조2)

김충만 목사
20190522
마가복음 1장

1강: 마가복음 맥잡기

김충만 목사
20190508
마가복음 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