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기도회

7강: 하나님의 나라를 거역하는 자들

설교자
김충만 목사
설교일자
2019-06-26
성경본문
막2.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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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수요 | 막2.18-3.6

하나님의 나라를 거역하는 자들

  

3역풍(2:18-22) -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님의 안티 홈페이지(anti-Homepage)에 이번에는 금식타령이 올라왔다. 자기 신분도 밝히지 않은 익명의 어찌하여’(7,16,18) 문하생이 예수님께 왜 금식하지 않는지 딴지를 걸고 있다. 첩첩산중(疊疊山中)이다. 벌써 세 번째 직격탄이다. 이슬비에 옷 젖는다는 말과 같이, 이처럼 빈총이기는 하지만 여러 번 맞으면 좋을 리가 없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여론몰이 식으로 몰아가서, 그것도 무엇보다 종교적인 목록, 그러니까 경건이라는 잣대에 그만 엮어졌기 때문이다. 참 놀랍다. 금식 한번 하지 않는다고 예수님마저도 경건하지 못한 사람으로 추락시켜 버리니 말이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을 한단다(18a). 다 좋다. 금식을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나는 하는데 너는 왜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결국 금식을 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쓰고 있느냐면 그것을 하다하지 않다는 사람 때려잡는 방망이가 되어 버렸다. 이런 식의 정죄와 판단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정말 금식이 거룩과 경건의 한 양식이라면 그걸 통해서 좀 더 거룩해져야 하고, 그랬다면 지금처럼 자신이 했다는 것 때문에 하지 않는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몰상식의 우는 범치 않게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경건하고 대단했으면 예수님까지 자기 기준에 맞추어 버리는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진짜 세상은 요지경이다.

내가 좀 잘하고 있고, 그래서 그걸 무기로 내게 강점인 신앙의 목록을 이처럼 휘두르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 역시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18a)는 그 사람처럼 살고 있다면 나는 그것만큼 신랑이신 주님이 배설한 혼인잔치와 새 포도주의 풍성함 밖에서 있는 불행한 사람이다(19-22). 더 한심한 것은 그러면서도 나는 금식한다. 나는 ○○한다는 배타적 독선주의라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진 나머지 주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무시하고, 사사건건(事事件件) 시비하며 살 수 있다.

지금 주님이 배설한 잔치가 진행 중인데, 새 포도주가 준비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세상은 금식의 본질은 온대간대 없애 버리고, 금식이라는 자기 의()만을 내세우며 떵떵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잔치가 시작되었음에도 예수님 밖에서 낡은 옷'낡은 가죽 부대'를 붙들고서 구관이 명관이다!”는 식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다.

이렇듯 2장에는 전혀 다른 두 세상이 공존하고 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만든 가짜 신앙의 목록표(list)에서 혼인잔치에 걸맞는 예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할 때다.

    

4역풍(2:23-28) -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5역풍(3:1-6) -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마침내 가장 강력한 역풍(逆風)이 불어온다. 그것은 안식일 논쟁이다. 사실 안식일 계명은 이미 구약에서 명문화된 말씀이다(20:8-11, 31:12-17). 하지만 지금 바리새인들과 사람들은 다같이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어기고서 뭔가 을 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2:24, 3:2). 아마도 유대 전통과 전승에 따른 39 가지의 금지 행위를 들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출애굽기에는 구체적인 금지 조항이 없다. 구약은 단지 음식 조리를 위해 불을 지피는 것(35:3), 땔감을 모으는 것(17:21- ), 상거래(10:31, 13:15,19) 정도를 금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삼고 있는 것들은 구약 율법에 구체적으로 금지된 것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을 두고, 또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을 두고 각각 시비를 걸고 있다. 전자(前者)는 다윗의 예를 들어 바른 이해를 구하셨고(2:25-26, 삼상 21:1-6), 후자(後者)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악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 옳다는 말씀으로 정리하셨다(3:4).

주님은 안식일이지만 삶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을 우선하시고, 바리새인들은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실 예수님은 유독 안식일에 뭔가를 더 행하심으로써 갈등의 씨앗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매우 놀라운 말씀에 따른 것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7-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억지로 끼워 맞춤으로써 사람을 얼마나 수단으로 취급해 버렸는지 모른다.

지금 주님은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통해 더 풍성한 삶을 살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이 율법에 종속되어 숨도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분노하시는 것이다. 즉 안식일의 바른 정신은 온대간대 없고 못된 형식만 남아 있는, 이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율로 바꿔버린 자들에게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던지는 호소로 받게 된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자기 자신은 안식일답게 살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들 마음대로 정해놓은 규칙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을 트집 잡고 문제 삼는 이런 놀부 심보.

세상을 온통 자기 기준을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평가하고 단정 지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거기에 걸려들면 예수님이라도 가차 없다. 주님은 지금 이러한 불신앙을 노여워하시고 근심하신다(5a).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례를 어기는가를 사람들이 주시하”(3:2)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시비하고,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다름 아닌 안식일을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말 머리털이 서는 일이다. 이게 인간이다.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알고, 모세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자임하는 자들의 몰골이다.

 

  부스러기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3:6)

 

주님은 이미 자신의 종말을 예감하셨다(2:20).

그걸 아시면서도 덫처럼 만들어 놓은 안식일 논쟁에서 진리를 양보하지 않으신다(3:1-6). 이제 사람들은 깐죽깐죽 거리며 시비를 거는 수준에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3:6)를 의논하는 자리까지 나아간다. 이날은 분명 안식일이었다. 바로 그날에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고 있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계획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헤롯당과 손을 잡는다. 헤롯당은 로마의 통치를 환영하는 유대인들로서 바리새인들과 완전 반대 입장이었지만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는 일에는 하나가 된다. 겉으로는 안식일을 지킨다고 소리치지만 속으로는 살인을 도모한다. ,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

다섯 번에 걸친 유대인의 반응 vs 예수님의 대답은 죄사함이 주는 삶의 진정한 자유를 그 누구도, 어떤 제도와 관습과 전통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목숨 걸고 선포하시는,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를 이루기 위해 오셨음을 명백히 하신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들어도 당신은 사람을 살리겠다고 응답하신다. 그분이 주님이시다. 이 은혜의 날개 안에 세리와 죄인들도 포함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복음이다.

바리새인들은 죄사함도 싫다, 새 포도주와 혼인잔치도 싫다, 안식일의 자유도 싫다며 끝내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불의한 의논을 시작한다. 아무리 말씀으로 설득을 해도 소용없다. 중풍병자가 치료되어도, 손 마른 사람이 치유되는 기적을 보고서도 말이다. 또한 주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천국 복음을 듣고도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마가는 이를 저들의 믿음없음이라는 선언에 올려놓고 넌지시 뭔가를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2:5).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중풍병이 치료되는 기적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바리새인들에게는 이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메시야를 보고도 신성모독 살인(殺人)을 그리고 있다(2:7 3:6).

그렇다. 2장은 세상의 축소판이다. 지금도 전혀 다른 두 그룹은 하늘 아래 공존한다. 주님을 믿고, 그래서 그분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똑같은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역시 동일한 주님이 하시는 언행(言行) 모두를 보고 들었음에도 복음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주님이 하시는 일을 훼방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두 그림은 어찌도 그리 유사한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공동체에 값없이 들어오는 초대받은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바리새인들에게서 받는 짜증을 견디게 만든다. 아무리 바리새인들이 날뛰어도 우리는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처럼, 세리와 죄인들처럼, 제자들처럼, 손 마른 사람처럼 주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의 넓고 큰 날개 아래 믿음으로 거하는 자 되어야 한다. 서기관들처럼, 바리새인들처럼, 헤롯당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이 고백을 올려드린다: “주여, 정말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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