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수요 | 요7.1-52
초막절과 그 전후 이야기
초막절(Feast of Tabernacles, 2,10,11,14,37)은 유대 3대 절기 가운데 하나로 장막절, 수장절, 추수절로도 칭하며 곡식을 모두 거두는 때에 행해지는 하나의 축제다. 특별히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기념, 1주일 동안 초막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였다(출23.14- , 레23.39- , 신16.13- ).
1. 초막절 前(1-10): 형제들의 불신앙
예수님의 가족이 2장 12절에 소개되고, 이어서 7장 정도면 가족들 역시 예수님이 행하신 ‘장차 … 보리라’의 표적과 언행(言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3-4). 그럼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5). 그러니 3-4절처럼 말한다. 이것이 ‘장차 … 보리라’(1.42,50)의 빛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적 무지다. 이렇듯 불신앙의 씨앗은 내부에도 있다.
2. 초막절 中(11-36): 예루살렘 성전논쟁
초막절에 예루살렘은 유대인들(11,32, 종교지도자들), 각처에서 올라온 유대인들(15,20), 예루살렘 사람들(25)로 가득찼다. 정작 예수님은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10)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성전에서 가르치시는데 12, 15, 20절과 같은 얘기나 들으신다.
예루살렘 사람들: “그가 어디 있느냐?” - 예루살렘은 지금 영적 ‘어두움’(1.5)에 깊이 빠져있다.
“좋은 사람이라 … 무리를 미혹(迷惑)하게 한다.”(12)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은 증거들
율법과 안식일과 할례가 어떤 도구(수단)로 전락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도용(盜用)되고 있다. 이것만큼 유대인들은 ‘빛’이 아니라 어두움에(1.5), ‘장차 … 보리라’(1.50-51)의 은총 밖에, 그래서 거듭남과 구원과 믿음과 영생과 상관없는 죄인일 뿐이다. 그러니 하는 말마다(12,15,20) 어처구니가 없다.
3. 초막절 後(37-52): 진정 당신은 목마른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신 일은 초막절 중간에 시작된다(14). 이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14-24), 예루살렘 사람들(25-31), 유대 종교지도자들(32-36)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칭할 때는 ‘무리들’(12,20,31,32,40,43)이라 칭해진다. 본문은 ‘성전설교’(초막절 강화)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로 시작되는 37-38절 말씀과, 이를 들은 무리들의 다양한 반응(40-44)을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43)라고 증언함과 동시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의 간악한 음모를 과감하게 기술한다(45-52).
예수님(37-3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주님은 7장의 회중들은 누구든지 목마른 자들이라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 중에서 ‘믿는 자’(38)는, 7장의 황무지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씀으로 약속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다(39). 결국 7장의 혼돈은 성령을 받지 않은 믿지 않는 자들 때문이다.
무리들(40-44): “예수를 인하여 … 쟁론이 되니.”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근거가 공교롭게도 “성경에 이르기를”(42)이라는 표현에서처럼 ‘말씀’이었다. 예수님이 ‘오실’ 것을 기록한 성경을 가지고 이미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들이 정당하다는 것의 증거로 ‘성경’을 꺼냈다. 하지만 예수님을 성경으로 거부한다!
하속들 vs 종교지도자들(45-46 vs 47-51)
이 혼돈의 와중에도 예수님을 ‘잡으려고’(32) 갔던 하속들도 그만 복음을 듣고 나서 믿음의 눈을 뜬다(46). 놀라운 것은 7장에서도 믿음의 눈을 뜨는 사람들이 있다(32,40-41,46). 반대로, 점점 더 죄의 갑옷을 입고서 진리를 대항하는 메아리 역시 커져가고 있다(47,48,49).
7장에도 희망은 있다.
분신앙의 언덕(형제들과 예루살렘)에도 생수의 강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척박한 땅(1,3-5,12,15,20,27,30,32,43-45,52)에도 예수님이 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묵묵히 성전에 서서 가르치시며 외치신다. 이것이 비록 세상이 영적 황무지일지라도 변함없이 희망인 이유다. 이 희망은 31절을 지나 37-39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이 희망은 갈보리를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