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수요 | 막14.1-11
내 옥합을 깨뜨릴 차례다!
(맛있는 마가복음, pp.133-134)
유월절을 앞두고(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잡아 죽일 논의를 하고 있다(3.5 참조). 여기에 가룟 유다까지 합류한다(10-11). 예루살렘은 서서히 메시야를 죽이기 위해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1-2). 이러한 때 오직 한 여인만이 십자가 복음의 향기를 발한다(3-9).
막달라 마리아(3)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은 그 가치가 300 데나리온 이상이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이었으니까 이는 한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한다.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한 여인이 향유를 부어 주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다(8).
만약 여인에게 다른 무엇보다 이 향유가 더 소중했다면 그녀는 향유를 깨뜨리고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붙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인의 행동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하다는 신앙에서 출발한 것이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임박한 십자가 죽음 앞에서 여인은 지금 주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8). 놀라운 신앙이다.
이 세상의 것을 분토와 같이 여기는 사람은 예수를 더 사랑하고,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를 그것만큼 덜 사랑하게 된다. 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는냐에 의해 드러난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즉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300 데나리온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여인과 세상 사람들의 전혀 다른 생활방식이다.
어떤 사람들(4-5)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부재(不在)다. 저들은 그럴 듯 한 명분을 앞세워 여인을 책망하지만 뒷거래를 통해서는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것을 은밀하게 흥정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4a) 여인의 행동을 나무랐다. 이중적이고 가증한 모습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으로 가보면 이 어떤 사람이 ‘제자들’(마26.8), ‘바리새인’(눅7.39),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요12.4)라고 증언하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실상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의 말(4-5)은 사악한 가짜요 추악한 위선이자 불신앙이다. 우리시대에도 이렇듯 ‘말은 그렇듯 한데 속은 아니올시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갸룟 유다(10-11)
‘어떤 사람들’(4; 요12.4) 가운데 한 사람이던 유다의 이중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가난한 자를 위한다며 정의감에 불타던 그가 은밀히 죄를 범하는 중이다: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11b) 그가 다름 아닌 제자 중 하나였다는데 큰 충격이 있다. 역시 종교적인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 해서 그가 신앙인이거나 성숙한 성도라 할 수 없다.
나에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인가, 향유인가? 하나님인가, 세상인가? 나는 그것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 사실 여인의 드림은 자발적인 헌신이었다. 내 안에 예수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는 믿음이 있어야 옥합을 깨뜨릴 수 있다.
예수님을 값비싼 향유 한 옥합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긴 마리아의 헌신과 믿음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주님이 작아지고 이 세상이 커지는 그런 불신앙이, 그런 유혹이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께 헌신할 수 있어서다. 진정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은 나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를 위해 깨뜨릴 때다. 이를 알고, 보고, 믿고, 행할 수 있는 자는 복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