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수요 | 막15.16-32
희롱 당하는 종,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갈보리 십자가가 서 있는 골고다 언덕이 보인다. 중앙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양쪽에는 강도들의 십자가가 있으며, 저 한 쪽 모퉁이에는 일단의 여인들이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서 흐느끼고 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서 골고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으며, 한 쪽에서는 ‘모욕’, ‘희롱’, ‘욕’(29,31,32)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때 나는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무엇 하려고 갈보리 언덕을 큰 무리와 함께 올랐을까.
나는 무엇을 보고, 또 어떤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나. 나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겠지. 그러나 정말 그런가. 아니 갈보리 언덕에서만 주님을 배반하지 않으면 다 되는 것인가. 오늘은 어떻고? 이제는 이미 일상의 습관이 되어버린 주님을 배반하는 행위는 무엇으로 설명하지. 세상과, 그때 그 무리들만의 죄악을 폭로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기에는 너무 위선적이다. 내 죄가 사해지는 것을 위해 오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며 살아가는 한 언제나 나는 갈보리 사람들과 같은 공범(共犯)이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십자가 위에 달릴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25-26)
▪“그 위에 있는 죄패(罪牌)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26)
▪ 예수를 모욕하여 … 희롱하며 … 욕하더라(29-32)
주님은 이 땅이 지워준 모든 군상들을 홀로 온 몸으로 감당하시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떠한 방식(방법, 길)도 불필요 할 뿐이다. 그것은 “이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38)에서부터 그 막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십자가의 주변인들의 언행심사는 완전한 가짜라는 것을 상징한다. 주님만이 승리하셨음을 의미한다. 이제 유대교와 유대 성전시대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대할 것과 소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19-20)
한 시대가 가고, 동시에 전혀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성벽처럼 둘러 있는 ‘휘장’과도 같은 모든 세력을 우리 주님은 단 번에 다 그의 피로 가르셨다. 이것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빌2.8b)심으로써 주님이 성취하신 것이다. 이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선두로 해서 그 어떤 세력이 방해를 해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놓여졌다. 이 일에 주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셨기 때문이다(요12.24).
김민석은 마가복음 뒷조사(2016, 새물결플러스)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도, 산 속이나 광야가 아니라 제일 인구가 밀집된 도시 한복판이었잖아요.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오히려 세상 속에서, 광장에서, 책임 있게 살아갈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거죠.”(201)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