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수요 | 막9.33-50
제자도Ⅱb_ 제자는 뭔가 다르게 산다.
(맛있는 마가복음, pp.106-107)
만일 … 하면 … 하라!(38-50)
38절이 흥미롭다. 앞서 ‘누가 크냐?’ 논쟁에 대해 예수님의 답이 -‘섬기는 자’- 제시되었음에도 여전히 38절이다. 무슨 말인가. 요한은 앞서 변화산에 올라간 제자 3인 중 하나다. 그럼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의 중심에 있는 제자다. 그런데 그가 산 아래에서 귀신을 좇아내지 못한 제자들 앞에서 38절을 말하였다. 이는 산 아래에서 머물던 9 제자들은 38절의 ‘어떤 자’ 보다 못한 자들이다는 의미다. 그럼 9 제자들은 일단 ‘누가 크냐?’의 그룹에서 제외되고 만다.
계속되는 수난예고와 어린 아이를 통해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 모양 이 꼴이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참으로 절묘하다: 으뜸의 자리는 제자들만의 것일 수 없다(38-40). 그렇다면 지금 제자들이 할 일은 예수님처럼 종이 되어 섬기는 것이지, 누구는 되고 무엇은 안되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다.
다시 흐름은 주님께로 넘어온다(39-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40) “주의 이름으로”(38) 살아가는 것은 제자들만의 전매특허(專賣特許)는 아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하면 주께서 시행하실 것을 이미 약속하셨다(요14.13-14).
이제 좀 더 구체적인 제자도(Discipleship)를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5,18,32,34,38) 경각심을 불어 넣으신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주님 곁에서 그분을 따르고 있다는 것만으로 제자도에 선 것은 아니다. 물 한 그릇이라도 주를 위해 사용하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41). 하지만 주를 믿는 자를 실족케 하면 그에 따른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것도 명백히 하신다(42).
더 중요한 것은 ‘섬기는 자’로서 42절 이하의 언행심사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손(43)과 발(45)과 눈(47)이 작은 것일지라도 해야 하고(41)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42) 죄를 범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는 것이 제자에게 더 우선하는 삶의 가치들이다. 주님은 지금 우회적으로 제자들의 느슨함을 질책하고 계신다(5,8,32,34,38).
교훈의 결론은 매우 간결하다: “서로 화목하라!”(50b) 결국 수난예고(8:31, 9:31)와 함께 시작된(될) 메시야 사역의 성취를 위해서는 9장의 제자들 모습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신다. 그래서 반목(反目)과 질시(嫉視)하는 것에서 화목으로 부르고 계신다(34 → 50). 이 기준에 놓고 볼 때 제자들에게 있어 산 위의 영광은 아직 까마득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누가 크냐?”에 신경이 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안에 있는 것들이 손과 발과 눈을 통해 어떻게,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50b)
은혜 받은 손과 발과 눈으로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주님의 제자라면 세상과는 좀 그래도 달라야 한다. 제자로 부름 받은 영광스러움을 생각한다. 그리고 ‘종’들끼리의 불화가 얼마나 꼴사나운 몰골인가를 또한 생각한다. 주님이 내다보시는 ‘그 나라’ 역시 분쟁이 아닌 화목이다: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3.24-25)
지금은 제자들끼리 분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종은 화목해야 종답지, 종이 마냥 으르렁거리며 살고 있으면 그 집안 꼴은 볼 것 다 본 꼴과 다를 바 없다. 주께서 명하신 제자도를 따라 “서로 화목하라!”는 명을 받은 자 답게 내가 선 땅을 아름답고 복되게 세워가기 위해 다시 허리에 수건을 두르며 ‘종’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제자로 설 때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