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1042주일 | 예수님의 역사적 재림, 곧 보게 된다(마24.29-51).

1042주일 | 24.29-51

예수님의 역사적 재림, 곧 보게 된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환난의 때,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앞서 28절까지 종말론적 환난이 지나면, 곧 이어 주의 재림이 있다고 말한다(29). 이처럼 핵심 주제는 첫째로 주의 재림이다: 환난 후에 인자가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9-31) 이때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질 것이다(30-31). 둘째로, 그렇다면 과연 재림의 시간은 언제인가(32-41):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36-37) 셋째로, 이런 맥락에서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재림 비유가 매우 적절한 신호등 역할을 한다(42-51).

 

 

재림 예수(29-31):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

 

마지막이 환난이고 그것으로 끝인가. 마지막에 될 일인 환난그러니까 환난을 당했다. 그래서 그것으로 끝이다, 결국 거기까지다이라면 얼마나 허무할까. 하지만 환난 이후에 경천동지(驚天動地, 29, 13.10, 34.4, 6.2) 하는 일이 있다. 무엇인가. 예수님의 역사적 재림이다: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b) 그렇다면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가 환난기를 어떻게 보냈느냐가 결정적이다. 두 그림으로 설명된다.

먼저,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들이다(30a). 심판이다. 이들은 자타(自他)가 공인하는 가짜들이다(4-5,10-12,23-26).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잇따라 예고편이 공개되었음에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살았으니, 그리고 돌이킬 여유도 없이 홀연히 재림의 나팔이 울려 퍼졌으니 울부짖어 보아도 이미 기회는 사실상 끝장난 이후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천사들이 온 열방에서 모으는 주님이 택하신 자들이다(31). 구원이다. 이들은 환난으로 끝이 아니라 그것을 영광의 승리로 이어가는 사람들이다(9,13-14,22). 이처럼 주의 재림은 역사적이며, 공개적이며, 공간적 제한이 없이 시공을 초월하여 영광 가운데 일어난다. 이렇듯 주의 재림은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적 목적을 성취한다.

 

 

재림 시간(32-41): 그 날과 그 때는?

 

그렇다면 과연 재림의 시간은 언제인가. 주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32)는 것처럼 이와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33a), 그러니까 앞서 말씀하신 환난이라는 밑그림에 따른 종말론적 징조들(1-31)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33b)라고 말씀하신다. 종말이 그렇듯이 주의 재림 또한 이미’(already) 시작되었으나 아직’(not yet) 온 것은 아닌, 그 사이에 자리한 긴장이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36a)에서처럼 징조가 성취되는 바로 그 날과 시간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속한 부분이다는 사실이다. 징조는 이것을 통해서 인자의 임함이 이제 곧 임박하고 있음을 알리는 하나의 사인(sign)이지 그것 자체가 인자가 오는 날과 시간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처럼 둘, 징조임하심은 명백히 구분된다.

그러나 이 둘이 구분된다는 것은 징조에 대한 긴장감을 늦추거나 인자의 오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이를 노아의 홍수 때를 예로 들어서 이 둘 사이에 끼어있는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우치신다. 홍수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가 있은 후부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간 날까지 사람들은 [홍수심판예고편]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38). 더더욱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39a).

우리 시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노아의 방주가 지어지고 있어도, 그러니까 종말에 대한 징조들이 하나 둘 신호등 역할을 감당하고 있어도 인생들은 그 신호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자기 생각대로 무시하며, 그러면서 자기 갈 곳을 찾아 살아간다. 종말과 재림이라는 영원한 표지판을 무시한 채 말이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의 사인을 버려 두었듯이 주님으로부터 버려 둠을 당할 것이”(40-41).

 

 

재림 비유(42-51): 깨어 있으라.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누가 종말을 사는 충성(신실)되고 지혜(슬기)로운 종인가?(45-51): “나는 주인의 것을 맡은 청지기다. 주인이 나에게 맡긴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종이고 주인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맡은 일을 한다해도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자기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는 자다.

두 종의 출발은 분명 같았다. 그러나 그 끝이 달랐던 것은 꾸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국까지 이르는 신앙의 레이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꾸준함이 능력이다.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때가 곧 올텐데 그래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12.1b)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답이다.

교회 안에도 두 종류의 종들이 언제나 공존한다. 이 둘 다 주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청지기들이다. 충성된 종처럼 주인의 의도대로 자신을 드리는, 따라서 이 사람의 초점은 자기가 아니라 언제나 주님이다(45-47). 그러나 악한 종처럼 가지 방식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그러기에 이 종의 결국은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48-51).

 

이제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자리를 지키는 특권을 가볍게 생각하는 철없음을 버릴 때도 되었다. 알지 못하고,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홍수심판이 시작되자 방주문 밖에서 통곡하며 문 열어 달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방주문은 이미 닫혔다. 비록 악한 종으로 살았을지라도 그래도 주인의 종으로서 맡은 일을 하던 종이었다고 소리쳐봐야 별 소용없는 때가 곧 올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시작된 종말을 사는 지혜자의 모습이다.

재림의 때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불가시성)과 재림이 있다는 것(역사성)은 다른 얘기다. 그러므로 깨어 그 때를 준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방주 밖의 심판이 집행되는 꼴 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의 삶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종말과 재림을 알리는 예비 종’(예고, 마지막에 될 일들-환난)본 종’(성취, 환난 이후-주의 재림) 사이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33b)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서 말이다. 지금은 깨어 있어야 할 때다. 곧 생각하지 못한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그날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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