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1117주일 | 세상이 예수를 거절할 때, 나는?(행4.1-12)

1117주일 | 4.1-12

세상이 예수를 거절할 때, 나는?

 

사도들은 3장에 이어서, 멈추지 않고 오직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1). 그런데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인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을 싫어한다(2). 이에 종교 권력이 백성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꺼내든 방법은 백성들에게서 사도들을 분리시키는 전략이었다.

 

 

설교 피드백(1-4): 가짜 증인 vs 예수의 증인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2). 그래서 사도들이 복음 전하는 것을 차단했다면, 그렇다면 다음 날’(5- )에 사도들에게 행한 종교재판의 주제는 2절이어야 맞다. 하지만 종교가들은 7절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라는 주제를 꺼내든다. 2절이 아니다.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관한 9절로 이어진다. 어떻게든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걷고 뛰는 사실조차 부정하기 위함이었다. 성전 미문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병 나은 사람을 통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증거되고 확장되자 이를 막고 덮어서, 결국 사도행전 18절에 응답해 가는 교회를 무너지게 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인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다(4). 하지만 이들 반대하는 자들 역시 그 모임이 점점 더 커지고 강력해진다(5-6). 흥미로운 것은, 십자가와 예수를 적대하는 자들 역시 하나님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이미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다는 점이다. 호칭과 지위는 그럴 듯 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저들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러니 저들은 사도들의 입을 막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붙잡아 옥에 가둔다. 하지만 사도들의 입은 막았을지 모르나 그들이 전한 복음과 그 복음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막거나 가둘 수 없다.

사도들의 설교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적대자들이고(1-3), 다른 하나는 믿는 자들이다(4).’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와중에도 말씀을 들은 3장의 사람들 가운데 믿는 자가 많았다. 무려 남자의 수가 약 5,000명이나 되었다(4). 1-3절의 반대에도, 4절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동일한 복음을 다같이 들었고, 걷고 뛰는 <병 나은 사람>(14)을 함께 보고 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이렇게 극과 극을 달린다.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를 Message 성경으로 읽어보자(16.1-3):

 

    “내가 너희에게 이것들을 말하는 것은, 장차 있을 때를 대비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심지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같은 일을 할 것이다.”

 

, 복음과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처럼 왜 적대적인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서 제사장이고, 성전 맡은 자, 그러니까 레위인들이다.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제사장이 있어도,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없다. 그러니 알지도,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먼저, 사도행전은 영광스럽고, 형통하고, 승리하는 그림만 그려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모두가 다 복음에 대해서 호의적이지는 않다. 복음 안에는 이처럼 다양한 색깔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적대적인 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흔들림 없이 사도행전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가?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응답, 5- )를 들어보자.

 

 

오직 예수(5-12):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산헤드린 공회와 대제사장의 문중(門中)이 다 모여서 복음의 반기를 드는 깃발을 더 높이 들고 있다(5-6). 이를 위해 저들도 모였는데’(5), 그런데 악을 위해서,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시하려고 사람들이 점점 더 힘을 합하여 모인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고난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증인됨이라는 기회를 삼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고난에도 영성이 있다. 세상이 십자가를 이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때도 베드로는 복음 증거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한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했던 베드로였다. 하지만 이젠 생명을 건 설교자(증인)로 당당하게 서 있다. 무엇이 그를 이처럼 변하게 만들었을까. 베드로의 간증과 메시지를 연속해서 들어보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2b,16)

    “구원 받을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 외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Message, 12)

 

베드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구원이라는 축복을 받는 그 일에 통로요 심부름꾼으로 쓰인다. 그는 그것을 자기를 높이는 업적 리스트로 사용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자신을 위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높일 뿐이다.

초점을 예수님께 맞춘 것이다: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의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이처럼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나 걷고 뛰고 있어도 불신의 무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어느 시대나 세상과 악당들은 사실을 사실로 보려고 하지 않고, 인정하기를 싫어하고, 할 수만 있으면 언제나 진리를 왜곡한다. 그렇지만 말씀은 언제나 죄와 악을 넘어선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5,000이나 되었더라.”(4)

하지만 멀리 갈 것까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이 말씀을 지금, 오늘, 나도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중요한 것은 이 복음이 나에게는 어떤 것이고, 무엇이 되었는가이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옛사람의 모습을 버렸는가. 나는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산헤드린 종교권력가를 비난할 처지가 못된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인가. 회개하고,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다. 다시 237-38절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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