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1236주일 |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다(행13.13-43).

1236주일 | 13.13-43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구브로(4)에서 비시디아 안디옥(14)으로 가는 중이다. 한편 핍박자 사울(7.58-9.2)이 회개하고(9.3-19a) 전도자 바울(9.19b- )이 되었다. 본문은 그 핍박자가 전도자가 되어, 마침내 사도행전에서 전한 사도 바울의 첫 번 설교다(16-41). 이것은 말하자면 설교자로서 공식적으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 설교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스도께서 핍박자였을 때 그를 9장에서 부르셨는데 과연 지금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가 드디어 알려지는 순간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 - 구 약(16-22)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초점을 맞춘다. 아브라함(선택, 17) 다윗(세움, 22)까지 구약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특별히 다윗을 두고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22b) 하신 약속의 성취로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광야교회’(7.38) 때부터 하나님은 이를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오래 참으셨다(17-18).

이처럼 참으시면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성취로서 가나안을 주시고, 구원자 사사를 계속해서 주셨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나라들처럼 왕을 구한다(19-21). 이번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구한 왕을 주셨다. 그러나 사울을 폐하시고, 이번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다.

구약의 역사는 이처럼 아무 자격과 공로 없는 불의(不義)한 자기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참으신다. 하지만 놀랍게도 가나안의 일곱 족속의 죄는 심판하신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시기까지 주셨으니 주셨다가”(19-21)로 오래 참으심이라는 사랑을 이어가신다. 이처럼 오직 당신의 신실하심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기까지 약속’(언약)을 지키신 것이다. 이것이 구약이고,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잘나고, 거룩하고, 깨끗해서가 아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하신 구약의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이 하신 일들 - 신 약(23-41)

 

오늘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있는 이 신약이 있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과 우리의 허물과 죄를 그것대로 집행하지 않으신 아버지의 사랑하심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약속의 미래로 가는 길을 계속 이어갈 수는 없다. 그리하여 때가 차매이처럼 신약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예수님을 보내셨다(23). 이스라엘은 구약처럼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이를 세례 요한이 앞서 증거한다(24-25). 하지만 더 먼저는 구약(선지자들)을 보내셨으나 정작 그들은 자신들이 외치는 진리를 알지는 못하였고(26-27),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그리스도를 죽게 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선지자들의 말을 다 응하도록 섭리하셨다(28-30). 이처럼 예수님은 구약 예언의 성취자이시다(32-35, 2.7, 16.10, 55.3).

, 구약의 약속을 신약을 통해,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정리한 다음에 바울이 얘기하고자 한 것은 이것의 결론과 같은 그러므로이후다(38-41). 그는 죄사함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인간은 구약이 선포한 율법의 행위나 의()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오직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믿는 것만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것을 성경은 이처럼 선언한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39a)였다. 이것이 바울 복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전하는 복음이다. 생각보다 결론은 매우 단순하다: ‘만약 이 복음을 거부한다면 선지자들이 전한 저주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40-41, 1.5)

 

바울의 설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수용적이고 긍정적이다.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설교해 달라는 부탁으로 설교에 반응한다(42). 그렇다면 바울의 설교가 저들에게 전달되었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을 따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비시디아 안디옥은 이렇게 해서 복음의 빛 안에서 깨어난다. 저들은 사도들과의 교제를 계속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43b)는 권면과 함께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맺는다. 복음은 서로 대화와 권면을 낳고, 가르침과 가르침을 받는 영적인 질서가 형성됨으로써 마침내 비시디아 안디옥에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설교가 마쳐지고 그 모임이 끝난 후에도 아름다운 만남이 계속되는 것이 놀랍다(43a). 바울과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고, 이를 증거한 설교가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그러자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다시 듣는 것을 기다리게 만든다.

이것이 무엇으로 되어졌는가? 설교 곧 신구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사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승부한다. 그는 다른 어떤 것으로 저들을 사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복음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그대로 행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저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복음 앞에 항복하도록 저들의 심령에 말씀으로 찾아가신다. 바울에게는 그 어떤 기교도, 수사학적 화려함도, 청중과의 타협도, 복음을 약간 상황에 적응시키는 물타기 같은 그런 인간적인 것이 없다. 복음 앞에 순전하고 정직하게 선다.

이것이 전도자요 설교자의 몫이 아닐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바울을 통해 알게 된 비시디아 안디옥에 세위진 교회를 통해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바라보게 하신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앞에 서는 방식으로 우리도 그리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손과 마음과 입술에 무엇을 들려 있는가. 우리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계승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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