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수요 | 막6.14-29
세례 요한의 죽음, 그 다음은?
(맛있는 마가복음, pp.69-72)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간다(14a). 하지만 이러한 영광을 찬성하지 않는 일단의 세력들을 다시 만난다. 지배 권력자들의 악함이 그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계속해서 성장해 갈 것인가? 마가(Mark)는 이러한 정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14a) 그렇게도 거역하고 배척했음에도(2.6-7,18,24, 3.2,6,22, 5.17, 6.1-6) 불구하고, 믿고 회개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빛’으로 밝히 드러난다. 이 두 전혀 다른 그림을 보라.
불행한 사람들
때때로 악은 ‘잔치’(21)로 위장한다. 좋은 날(21)이자, 춤을 추며 기뻐하는 날(22)이라 포장하지만 그러나 바로 그날은 광야의 외치는 자였던 세례 요한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얼굴은 웃고 있으나 손에는 살인의 피가 묻어 있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가장 비극적이요 불행한 사람들이다.
① 헤롯왕(King Herod): 이복 동생의 아내를 취한 율법적(도덕, 윤리)인 면에서도 부정한 사람이다(17-18). 그는 요한의 설교를 듣고 죄책감 때문에 두려워 번민하지만 회개하지는 않았다(20). 결국 요한을 희생하면서까지 자기 욕망과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②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 세례 요한을 죽이며 악으로 선을 이기려는 쪽으로 걷는다.
③ 갈릴리의 귀인들: 모세의 율법은 이복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을 죄라며 금한다(레18.16, 20.21). 그러나 이 율법을 모르지 않는 자들임에도 헤롯과 ‘잔치’ 쪽에 붙는다. 율법에 예수님을 철저하게 적용시킨 것과 대조적으로 헤롯에게는 율법과 관련하여 일언반구도 없다(2.7,23-24, 3.2).
행복한 사람, 세례 요한
헤롯은 하나님을 업신여겼다. 그는 율법이 금하고 있는 계명을 정면으로 거역하였다. 그럼에도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헤롯의 ‘죄’에 대해서 정죄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은 죽어서까지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세례 요한의 죽음을 대하면서 든 도전이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실까.’ 헤롯과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 앞에 “그것은 죄다!”라고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는 선지자적인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세상이 더 이상 오염되지 않도록, 아니 교회가 이 타락한 세상에 휘감기지 않도록 이사야처럼, 요한처럼, 우리 주님처럼 말씀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임을 증거해야 한다. 요한의 장례식에 참여하면서(29), 그처럼 헛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는가라는 고백 앞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