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540주일 | [02] 광야복음, 믿음에 심겨 여리고에서 꽃피다(수2.8-24).

540주일 | 2.8-24

[02] 광야복음, 믿음에 심겨 여리고에서 꽃피다.

 

     ▪광야 - 굳게 닫혔다 - 가나안 사람들

     ▪광야 - 복음 .. 믿음 - 기생 라합

 

2차 가나안 보고서: 기생 라합 이야기

기생 라합의 신앙고백(9-11, 4.39 참조)과 정탐꾼들과의 언약(12-14)은 매우 놀랍다. 이 믿음의 기원은 어디인가. 요단강 건너 8떨어진 여리고에 사는 그녀가 어떻게 이러한 복음을 알고 있었을까.

2 정탐꾼들의 계획은 전부 틀어진다. 이들은 다 노출되었다. 이젠 정탐은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섭리가 꿈틀거리는 순간이다.

9절 이하 왜 라합이 앞서 그런 언행을 했는지가 밝혀진다.

내가 알았다(9). 과거 어느 때부터 지금까지 알고 있다.

여호와께서 주셨다(9) 이미 주셨다. 이방인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외쳐진다. 이는 이미 40년 전 여호수아와 갈렙이 한 고백 아닌가. 그럼에도 그때에는 10명의 정탐꾼에게는 이 확신과 믿음이 없었다. 그런데 이방인의 입에서 40년 후에 이 고백이 터져 나온다. 놀랍다.

9-11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하고 고백해야 할 것들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근거요 토대다. 그런데 가나안이 이를 알고, 듣고, 고백하고 있다. 무엇인가? 이방에도 복음은 전파되고, 그렇다면 저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이미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미 그녀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라합의 입술에서 신명기의 고백이 터져 나온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우르(Ur)를 떠나듯, 라합 역시 여리고를 떠난다.

12-13자비(헤세드, 선대) - 여호수아에 처음 나오는데 이게 라합에게도 나온다. 실상은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요구다(7.1-5). 그런데 정탐꾼들은 이 요구를 받는다(14).

18-19 유월절 분위기. 후에 여리고 무너질 때 라합의 집만 그대로 남는다.

라합은 가나안과 가나안의 신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간다.

야고보서 아브라함과 비교하는 인물로 라합이 나온다. 아브라함 급이다.

 

가나안 사람들

이들은 함의 후예들로써 우상을 섬기고 있었으며, 사악하였다. 그리고 라합이 들었던 하나님의 소식을 진정으로 듣지 못했다(9-11).

 

기생 라합이 여리고에 살 때 어찌 혼자였을까. 수 천, 수 만의 가나안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 이 때 또한 어찌 라합이 간증하듯 토해내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이야기를 그녀만 들었겠는가. 이 이야기를 누가복음 425-27절 스타일로 기술해 보자: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가나안 땅 여리고성 안에 많은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구원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라합과 그의 가족들 뿐이었느니라.’

다시 그럼 이를 지금 우리 시대에, COVID-19 시대에 넣어보자: ‘COVID-19 때에 부산광역시 350만 시민들 가운데 50만이라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양무리교회 사람 OOO 뿐이었느니라.’

정신이 번쩍 나지 않는가. 노아시대에도 그들이 믿던 믿지 않던 그것과 상관없이 약속(언약)의 방주는 지어진다. 그리고 예수님의 회상처럼 방주에 들어가는 그 때까지도 방주에 들어가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어졌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24.38-39)

지금 우리 시대 역시 동일하다. 교회가 어쩌구저쩌구, 교회 다니는 사람을 향해 이러쿵저러쿵, 성경과 진리와 하나님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 받아 마땅한 저주를 그 값이 어떨 것인지도 모른 채 입에 올리는 시대에도 사렙다 과부처럼, 나아만 장군처럼, 기생 라합처럼, 노아의 일곱 식구들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와 축복 안으로 걷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역사는, 하나님은 바로 그들이 최후 승자가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여리고행전

광야의 이스라엘이 복음과 하나님으로 살아야 그 소식이 가나안 여리고에 전해진다. 복음은 광야라는 박스(Box)에만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 여리고 한 복판에 살아도 라합처럼 믿음의 눈을 뜨면 복음이 보이고 들린다. 그렇다면 여리고라는 세속도시가 아무리 하나님 거리두기, 이스라엘 거리두기, 광야교회 거리두기, 광야복음 거리두기를 통해 교회와 복음과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기독교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거리두기를 하도록 한다고 하더라도 가나안 여리고에서도 복음은 들을 수 있고, 여리고에서도 믿음은 꽃피울 수 있고, 여리고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눈을 뜨고 복음의 꽃을 피우는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여리고처럼 광야복음을 향해 굳게 닫고 있어도 광야가 하나님으로 가득 넘치게 될 때 이 광야복음은 여리고(세상, Pandemic/팬데믹, Covid-19/코로나)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라합과 그의 가족을 구원으로 초대하신다. 여리고라는 세상에도 복음은 여전히 능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과 하나님 거리두기라는 세상에도 복음은 여전히 능력이다. 우리가 복음으로 세상 한 복판을 살아낼 때 세상의 한 복판인 가나안 여리고에도 부흥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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