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1263주일 | 주께 드리는 1차 선교보고서(행14.19-28)

1263주일 | 14.19-28

주께 드리는 1차 선교보고서

 

바울이 돌에 맞은 고난은 아마도 이번 한 번이다(고후11.25).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런 와중에도 루스드라에 거하는 제자(성도)들의 수가 돌에 맞아 죽은 것처럼 된 바울을 둘러설 정도로까지 많아졌다는 점이다(20a). 어쩌면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이처럼 성 밖으로 버려진 곳까지 그의 제자들이 왔다면, 과연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왔을까.

편안한 마음도 아니었을 것이고, 상태가 어떤지 구경하려고 온 것은 더더욱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것보다도 지금 상황에서 바울 쪽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바울 곁에 와 있는 것은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들 또한 바울처럼 생명을 건 것이다.

 

 

주께 드릴 열매 가득 안고!(21-25)

 

바울은 이튿날, 돌에 맞아 죽은 것처럼 되었던 그 모습으로 루스드라에서 더베로 갔다(20). 더베는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로 오기 전에 잠시 들렸던 곳이다(6). 이렇게 해서 지난 제1차 선교여행(13-14)을 통과해 온 지역들을 다시 들려서 이 여행을 시작했던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귀환 여정(21- )이 시작되는 셈이다. ,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일들은 어떤 것들인가. 그러니까 1차 전도여행의 열매는 무엇인가. 마침내 1차 선교 보고서는 이렇게 증언을 시작한다.

 

[1]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21)

죽을 위기를 넘기고 찾아간 곳이 더베였고, 그런데 바울은 그곳에서도, 돌에 맞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던 바로 그 십자가 복음, 이것을 전하는 일을 계속한다. 과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다. 그야말로 자신의 생명보다 주와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순교적 신앙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게 된다. 참으로 놀라운 열심이다. 그는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장 먼저 다시 더베에 들려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많아지는 일을 위해 죽도록 충성한 것이다.

 

[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22)

이어서 주의 이름으로 격려하는 일을 한다. 믿음에 계속거하라, 머물러 있으라고 말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바울이 돌아보는 곳들은 모두 다 핍박과 고난이 심했던 지역들이다. 따라서 자칫 어려움 때문에 이들은 믿음을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바울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믿음이 아니라 변함없는 믿음 안에 살아가기를 격려한다. 환난은 아무 의미 없는 소모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환난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23-25)

특별히 바울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중심으로 그곳에 가정교회(지역교회)를 세우고, 그리고 그 교회에 장로(감독, 1.5), 곧 사역자들을 택하여 세운다. 자신은 순례자가 되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살 것이기에 지역교회(가정교회)가 세워지면 그곳을 맡아 다스릴 수 있는 지도자들을 세우는 일에 우선적으로 헌신한 것이다.

 

[4]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27)

다시 출발지 안디옥이다. 이곳저곳을 돌고 돌아 처음 시작인 미션 캠프로 돌아왔다. 화난과 핍박이라는 생명의 위기를 넘어 돌아왔으나 바울과 바나바는 달라진 게 없다. 그들의 입에는 여전히 하나님만 있다. 그들은 고생담이나 여행담을 늘어놓지 않는다. 자신들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했는가라는 성공담을 간증하고 있지 않다. 결코 스스로를 자화자찬(自畵自讚)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복음과 십자가 뒤에 철저하게 감춘다. 이처럼 사람 냄새는 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다. 놀랍다. 자신들이 얼마나 위대하게 쓰였는가를 한마디라도 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말하고자는 선교다.

 

바울은 역시 큰 그릇이고 넓고 멀리 보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자신을 몹시 힘들게 했던 곳, 죽이려 했던 곳, 여전히 반대하는 자들이 기다리는 곳임을 알면서도 이런 사소한 것들이 복음이 가는 길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살아간다. 자신과 복음을 환경과 사람에게 제한하지 않는다. 어떤 결과에 대한 자신의 마음 상태나 사람의 생각이 복음으로 순례하는 여정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오직 복음을 위해 끝까지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한다.

이런 자세로 열심히 일하다가 멈추어보니 다시 안디옥이다(26).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와 마치고 돌아왔을 때나 바울의 언행에는 달라진 게 없다.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하면 좀 거칠어지기도 하고, 어디를 가나 자기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은근히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수고와 눈물을 좀 알아 달라는 것일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바울은 무엇보다 많은 이방인들을 성도로 만들었고, 그래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공로까지 있으니 이런저런 힘도 실릴 수 있는 충분한 요건들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 갈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과거의 열매나 그것이 가져다 준 이자(공로)를 먹고 살지 않았고, 오직 주님과 복음 안에서 살아간다.

복음을 위해 돌아 맞아 죽는 위기에까지 이르러도 누군가는 다시 그 길을 간다. 그러나 또 누군가는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 역시 생명을 걸고 그 길을 간다. 똑같은 인생길이다. 그런데 극과 극을 달리한다. 누구는 신앙을 따라 그 길을 가고, 또 누구는 신념을 따라 인생길을 간다. 나는 사도행전을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이자 증인인 신앙인으로 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믿고 따르는 세상적인 가치를 우선하는 지식인으로 인가. 전혀 다른 두 길이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누구의 길을 따라가는 사도행전의 후예인가. 이제는 사도행전의 길을 따라 살아갈 때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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