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새벽 | 창34.18-31
세겜의 비극2: 할례가 복수의 수단이 되다.
불의한 보복(18-29): 할례가 보복의 도구가 되다.
가나안 땅 하몰과 세겜 부자는 야곱 공동체와 통혼을 논의한다(21). 히위 족속은 야곱의 아들들이 제안에 따라 ‘그 모든 남자가 할례’(24)를 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야곱의 아들들은 히위 족속을 복수하기 위해 거룩한 할례를 불의한 보복으로 사용하는, 하몰과 세겜 부자 역시 통혼을 통해 결국 야곱 공동체를 흡수하겠다는 불의한 생각을 한다: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23a)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명하신 할례(17.10-14)를 인간적인 보복과 욕망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할례언약마저 자신들이 생각하는 목적을 이루겠다는 점에서 위기는 증폭된다.
하나님은 조상 아브라함과 창세기 15장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17장에서 언약 백성이 되는 표(sign)로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은 할례를 행하라 하셨다. 때문에 히위 족속이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아브라함의 씨가 아닌 심판 받아야 할 이방 가나안, 하나님으로부터 결국 400년 후에 심판 받을 것이라 예고된 자들이 할례를 통해 언약 백성이 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따르고, 예배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라고 받으라, 그러겠다고 받겠다는 할례도 아니다. 지금 일어난 디나의 강간사건을 빌미로 이스라엘과 하나가 되는, 그래서 약속의 땅과 아브라함과 이삭으로부터 난 백성이 아닌 히위가 아브라함의 자리에 앉게 되는 일이 일어날 참이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어찌되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는 그럼? 지금 야곱 공동체는 이처럼 세속화라는 죄악에 요동치는 중이다.
야곱의 시각(30-31): 그들이 … 나를 죽이리니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딸 디나의 강간 소식을 접할 때부터 소극적이다. 그는 딸의 고통과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딸의 욕보임에 대한 아들들의 보복이 자신에게 불행과 재난과 화(禍)가 되는 것만 생각한다: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30b)
그는 히위 족속과 하몰(세겜)이 자행한 죄악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오직 땅을 사고 이곳에 정착하려는 계획이 일그러진 것에 대해 분노한다. 이게 얍복 나루를 건넌 야곱이다. 참 실망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은 쉽게 변화되고 성장과 성숙이 어려운 것일까.
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땅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할례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지금 야곱과 그의 아들들에게서 일절 발견되지 않는다. 오직 그는 밧단아람에서 얻은 재산과 식솔들, 태중에 잉태한 베냐민을 포함해 12 아들들, 그러니까 자신이 20년 동안 밧단아람에서 죽을 고생해 마침내 얻는 성공을 지켜내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야곱과 그의 공동체에 뭐가 가장 문제인가. 디나의 아픔과 절망도 문제다. 할례를 복수의 수단으로 삼은 것도 문제다. 세겜과 하몰이 당한 일을 보고 들은 이웃 족속들이 야곱이 두려워하듯 야곱과 그의 공동체를 보복하기 위해 전쟁을 선언할 수도 있는 것(30), 이것 역시 문제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야곱 공동체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앞서 아브라함을 통해 하신 말씀(언약)과 지금껏 야곱이 만나고 경험하고 알고 믿은 하나님이 이처럼 위급한 상황과 형편임에도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누구도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 이게 야곱 공동체가 맞이한 가장 큰 위기다.
하나님이 택하사 땅과 후손을 약속하신 언약의 자손들, 중요한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야곱 공동체가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을 옆으로 밀어놓고서 오직 자신들의 생각과 계획과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한다. 이것이 믿음의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지금, 오늘, 현재를 어떻게 무엇으로 왜 누구와 더불어 풀어가고 해결해 가는 중인지를 돌아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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