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새벽 | 대상15.1-29
•다윗처럼인가? 미갈처럼인가?
•다윗은 13장에서의 동일한 문제(case)에 대한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하지는 않았다.
이는 언약궤 운반에 관한 말씀과 그 실행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로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15)
다윗은 이를 위해 율법을 가까이 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죄악)을 정확하게 볼 줄 알았다:
“전에는 너희(레위 자손)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규례대로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13, 민4:5-15, 7:9 참조)
사실 다윗은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것에만 몰두했지,
언약궤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것이 13장에서 웃사를 통해 맛본 영적 교훈이었다.
우리 역시 때로 자기가 좋(옳)으면 무엇이든 괜찮거나, 이해될 수 있다는 식의 오만을 부릴 때가 있다.
소위 “좋은 게 좋지 않느냐?”, 또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혹은 “꿩 잡는 게 메”라는 꼴인데,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생각을 결코 옳다고 동의하지 않는다.
다윗은 영적으로 성숙해 간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하게 된 셈이다.
그는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서 자신의 죄를 씻는다.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은 단호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에 따른 하나님의 식이어서다(12,14-15).
사실 수레로 언약궤를 운반하는 것은 이방인의 풍습이었다(삼상6:7-8).
하나님의 법이 이방인의 습관에 밀리는 경우를 목도하게 된다. 그
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배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이렇듯 과정(수단)은 결과(목적)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래야만 웃사의 죽음을 결코 헛되지 않게 게 아닌가.
한편 이 영광스럽고 복된 날, 율법이 시행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식대로 법궤가 돌아오는 날에 하나님과 반대로 걷겠다는 사울의 딸 미갈을 만난다.
오늘 우리도 다윗처럼인가, 미갈처럼인가를 묵상에 품고 기도와 은혜의 삶 앞에 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