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1137주일 |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행6.8-15, 7.54-60)

1137주일 | 6.8-15, 7.54-60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그렇게 죽었다. 목숨과 바꾼 설교 한 번 하고 순교한다. 왜 스데반은 죽는가. 사실 스데반은 죽으면 안 된다. 그 정도의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지켜 주어야 한다. 그래야 주의 일을 하지 않겠는가. 스데반처럼 능력의 사람은 살아 있어야 유익하다.

 

 

산 자여, 따르라!(6.8-15)

 

스데반은 자기처럼 회당에서 복음을 말하는 것은,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다시 어떤 결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설사 그에 죽음일지라도 정도(正道)를 걸어가는 길을 우회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돌발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처럼 죽은 것이다(23.34,46 7.59,60). 그렇자면 진짜 사는 것, 그러니까 진정한 삶(영생)은 곧 바른 죽음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스데반처럼 산다는 것은 스데반처럼 죽은 것이다. 동시에 스데반처럼 죽는 것은 스데반처럼 사는 것에서 온다. 이처럼 진짜 스데반은 죽는다. 아무나 죽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면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스데반처럼 살려고(죽으려고) 하지 않고서 그와 비슷한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기에 순교는 그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는 스데반이 아니다.

때문에 문제는 이것이다: ‘모두들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축복이 필요할 뿐이다.’ 살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다. 죽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 앞으로 당당하게 나아가는 스데반의 후예들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시대는 스데반처럼 죽은 자가 없다. 그 결과, 그렇다면 누가 살아있는가. 스데반 모조품(짝퉁)들이 살아있을 뿐이다. 아무도 스데반처럼 죽지 않아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서부터 이처럼 단지 살아있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은 타협, 그러니까 세상적인 것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살기 위하여, 그래서 소위 상황(situation)이 고려되고, 또한 변명과, 자기 만족, 자기 자랑, 자기 열심, 자기 공로, 자기 영광이 교회 안에 판을 치는 것이다. 예수를 이용해 예수로 죽고 나로 살겠다고 해서다. 아무도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진실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살려는 생각이 없다. 그러니 육신적인 자기와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진짜같은 가짜들만 넘쳐나는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7.54-60)

 

영원히 사는 것은 한 번 죽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때문에 거듭나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그러니까 나는 죽고 예수로 다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거듭난 것은 가장 잘 죽기 위한 진짜 삶의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첫 열매이시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다시 사는 부활의 아침을 여는 열쇠였다. 새롭게 사는 부활은 고난과 죽음 없이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죽음은 끝이 아니고 그 속에 영생이 있음을 아는 자가 바로 스데반이다. 그러니까 영생은 먼저 죽음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바로 스데반이다. 그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됨으로써 이 진리를 알았고, 그래서 주를 위해 죽음으로써 영원한 삶을 시작한다.

그는 죽음으로서 그것이 끝이 아닌 다시 사는 것인 것을 알았고, 믿었고, 그래서 사는 것을 위해 죽음을 택했다. 그랬으니까 더 살려고 구차하게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후일을 기약하자!’라는 타협이나 자기 변명으로 스타일 구기지 않았다. “내가 없으면 안돼!”라고 착각하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추악하고 미숙한 모습이다. 사실 순교란 어느 날 갑자기 죽자!”, 그래서 죽는 것이 아니다. 순교는 늘 영원한 생명의 복음 안에서 사는 것으로 준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자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생의 목적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을 완전히 드릴 수 없다. 따라서 순교는 몇 마디의 말이나, 다짐, 그리고 결심, 단지 죽어버리는 행동이 아니다. 믿음이고, 사는 것이요, 죽음이고, 진짜 사는 것이 시작되는 소망의 항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진리와 함께 죽는다.

 

그러므로 모조품이 아닌 예수로 사는 진짜 신앙인은 결코 비굴하게 살지 않는다. 세상과 자신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다. 예수로 살고, 복음으로 산다. 그는 살아있는 목표가 분명하다. 이 땅에 사나 이미 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스데반처럼 기꺼이 드리며 산다. 이것이 헌신이고 섬김이다. 그러므로 스데반처럼 죽는다는 것은 스데반처럼 사는 자다. 따라서 스데반처럼 살지 않으니 스데반처럼 죽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 이 귀중한 때를 낭비하면서 육신을 위해 살아가기에, 그 결과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죽어가는 것은 순교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의 복음으로 나를 살려서, 나는 죽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살아가는 자로 세워야 한다. 이왕 한 번 뿐인 인생, 어차피 죽을 몸, 그렇다면 더 값지고 보람있게 예수로 살고 또 나는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진짜 살기 위해 나는 죽고, 정말 잘 죽기 위해 예수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스데반이 우리에게 죽음으로 알려주는 복음이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이라면 그는 결코 진정한 새생명의 삶을 살 수 없다. 잘 죽자.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당당하게 나아가 사는 것, 곧 죽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나의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 잘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처럼 죽은 후에 후회해야 아무 소용없다(16.19-31). 이처럼 죽어서는 살 수 없다. 잘 죽기 위해 사는 것이 곧 잘 살기 위해 죽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먼저 보여주신 길이다(2.5-11).

스데반처럼 살고, 스데반처럼 죽으면 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스데반처럼 복음의 씨앗을 뿌리면서 살아야 스데반처럼 죽고, 스데반처럼 죽어야 비로소 영원히 산다.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심으로 다시 사셨다. 진짜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다. 우리는 잘 죽기 위해 산다. 영원히 살기 위해 잘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 살아있는 이유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는 것이다. 스데반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렇다면 이게 그 다음 차례는 나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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