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새벽 | 사15.1-9
모압에 대한 애가(哀歌)
모압은 롯과 그의 큰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창19.1-38). 때문에 이들 모압 족속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받는다(신2.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그럼에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발람을 통해 저주하려 하였고(민22.1-24.25), 이후 사사시대에는 실재로 18년 간 이스라엘을 지배하기도 했다(삿3.12-14).
하지만 모압은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한다(삼상14.47, 삼하8.2, 왕하3.4-27, 대하20.1-30). 그러다가 마침내 이사야를 통해 패망을 선고받는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모압의 모습, 과연 어떤가. 애가(哀歌)를 부를 수 밖에 없는 이사야의 마음은 어둡기 그지없다(15.5a, 16.11). 모압은 이스라엘의 형제국이기 때문이다(신2.9). 이렇듯 “하룻밤에 … 삼 년 내에”(15.1, 16.14) 패망하여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임에도(15.6, 16.8-10)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닌 헛된 우상 앞에 줄을 서고 있다(15.2, 16.12). 아니나 다를까 ‘교만’(16.6)은 모압을 서서히 침몰하게 만든다.
모압의 임박한 패망을 예고하면서 선지자 이사야는 애가(哀歌)를 부른다. 모압은 ‘하룻밤에’(1) 망하여 황폐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은 어제와 오늘을 완전히 갈라놓는다. 그럼에도 저들은 디본 산당으로 올라가 조각한 우상에 불과한 나무 조각을 붙들고 통곡한다. 온 모압에 통곡과 애통의 눈물이 흘러 넘친다(2-5). 마치 호화유람선 타이타닉이 침몰하는 것처럼 말이다. 죄는 이처럼 어제의 웃음과 멀쩡함을 계속해서 보장하지 못한다. 문제는 오늘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바로 그 밤에 이제까지의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럼에도 하나님이 아닌 산당(山堂, 2)에 올라가 울며 통곡하는 모압의 몰골이 측은하기 그지없다. 울음은 있으나 회개는 없고, 뭔가 돌파구를 찾고는 있으나 여전히 하나님은 없다. 모두들 엉뚱한 곳에서 희망을 찾는다. 모든 것이 황폐하게 끝났고(6), 그럼에도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7a)이라는 헛된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 건너리니”(7b)의 모습으로 피난 행렬이 이어진다(7-8). 하지만 하나님이 더 하시는 재앙은 인간적인 퇴로를 차단한다(9a). 인간이 붙들었던 희망(‘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 7)의 종점에 그들을 찢을 사자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9b).
하나님 없이 살아도 문제가 없었다. 어제까지 말이다. 그러나 오늘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전형적이고 습관적인 착각이다. 하룻밤에 모든 것이 모압의 곁을 떠났듯이 우리 또한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쥔 어제의 것에 스스로 자족하고 있다면 오늘의 파산은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를 지켜주고 인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룻밤’에 어제와 오늘을 극명하게 분리시키시는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애가(哀歌)의 오늘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