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143수요 | 참된 정결을 생각한다1(막7.1-13)

143수요 | 7.1-13

참된 정결을 생각한다(1)

(맛있는 마가복음, pp.77-79)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자,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함정(2-5)에 제자들과 예수님이 빠지게 되었고, 예수님은 고르반’(Corvan)을 예로 들어서 바리새인들의 교묘한 이중성을 논하신다: “너희들은 정결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왜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너희가 고르반이라는 미명 하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정결인가?’

  

고르반(Corvan):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11)

고르반이란 내가 부모님께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11-12),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을 가리킨다.

원래 고르반’(성전에 바친다)이란 모세의 율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바리새인들이 교묘하게 만든 하나의 악법과도 같은 전통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식으로서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면하고 싶으면 그 재산을 성전에 바친다는 서약을 이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고르반이라는 종교적 미명 하에 불효가 자행되었던 것이다. 나의 재산이 고르반이 되었다는 말 한마디, 그러니까 성전에 바쳤다는 허위의 그 말로 부모 봉양을 회피했던 것이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6, 29.13)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7)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8-9)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행위는 참으로 위선적이었다. 이는 헛된 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포장지는 하나님의 계명인데 내용물은 사람의 계명이다.

 

[1]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종교성이 고르반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거나 모시고 살기를 꺼려한다.

   ∙헌금은 잘하면서 부모님께는 용돈 드리는 것을 다른 자녀에게 미룬다.

   ∙교회 일 한답시고 집안 일은 나몰라라 해 배우자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

   ∙기도는 청산유수(靑山流水)처럼 잘 하면서 행동은 아니올시다.

   ∙성경은 잘 알면서 신호등이나 교통 법규는 예사롭게 생각한다.

   ∙자신은 교회에 오면서 자녀들은 학교나 학원으로 보낸다.

  

[2a] 이기주의라는 죄의 고르반이다. 내가 잘 되고, 나에게 좋은 것이라면 어떤 것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모든 기준이 . 내가 드리는 기도의 거의 전부가 나와 자녀와 가정인 점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2b] 편리주의라는 죄의 고르반이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내가 신앙생활에 편리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이다.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거기엔 관심 없고, 나의 유익과 편리만을 쫓아 철새처럼 날아다니는 신앙의 유목민 시대가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2c] 적당주의라는 죄의 고르반이다. 하나님께 크게 혼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당하게 드릴 것 드리고, 예배 드려줄 것 드려주고, 교회 나갈 때 적당하게 나가주면서 유별나지 않게 살자는 식이다. 성경을 알고 신앙이 깊어지는 것 같은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냐면 하나님과 적당히 거래하고, 적당한 선에서 죄 의식을 무마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적용하면서 자유해 버리는 쪽으로 길들여져 간다.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누구인가. 사람의 유전, 즉 전통을 따르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라 할 수 있는가. 고르반을 따라 사는 자가 참된 정결로 사는 자일 수 있는가. 아니라면 누가, 무엇이 참된 정결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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