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새벽 | 겔14.1-23
희망은 심판 사이에 흐르고
두 얼굴의 실상(1-11)
놀랍게도 ‘장로 두어 사람’(1)으로 대칭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지극히 이중적이다. 이들은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3a,4b,7b)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고’ 뿐 아니라 동시에 ‘자기를 위하여’ 뻔뻔스럽고 가증하게도 선지자를 찾고 구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음이다.
이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5a)다 하시며,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 떠나라”(6) 선언하신다. 이 죄악을 해결하지 않으면 “내 백성 가운데에서 끊으리니”(8b)라는 최후통첩을 말씀하신다.
불가항력적 심판(12-23)
하나님의 네 가지 중한 벌(심판, 12-21)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원인은 하나님께 범죄함이고(13a), 결과는 ‘네 가지 중한 벌’(13b-20)이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그 중에서 끊으리니’(21b)처럼 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왜 그런가.
희망의 복음(22-23)
두 가지 희망이 심판적 집행과 상황 안에 분명하게 자라고 있다. 하나는,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네 가지 중한 벌’을 통해 그 땅 이스라엘에서 사람과 짐승을 끊는다 할지라도, 그가 비록 의인(노아, 다니엘, 욥)이라도 그 심판으로부터 “자기의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로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14,16,18,20) 말씀하신다. 죄의 값을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하신다. 우리의 대속자 곧 유일한 구원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둘째는, 이 심판 집행 “그 가운데에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22a) 하신다. 하나님은 “너희가 …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22b)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23)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렇게 심판으로 끝인가. 그러니까 나라는 멸망하고,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란 말인가. 결코 아니다. 끝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포로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신다. 참담한 심판 그 사이에 희망이 흐르고 있음을 말이다(1-21 → 22-23). 이것이 복음(福音)이 아니면 무엇인가. 희망은 이처럼 심판 사이에 흐르고 있다. 그럼 지금 이 시간마저도 희망이 흐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