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5주일 | 시9.1-20 - 추수감사주일
내가 부를 노래가 있습니다.
다윗과 이방 나라들 사이의 영적 전쟁이 치열하기만 하다. 비록 이 싸움은 원수들에게 겹겹이 우겨쌈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싸움은 이미 다윗의 승리로 끝났다(1-4). 다윗의 능력으로 인가. 아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윗그룹’의 승리를 이루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애가(愛歌)가 ‘너희’(9-12,18)의 찬양과 기도가 되기를 소망한다. 자신만의 독주(Solo)가 아닌 너희와 함께 부르는 이중주(Duet)로 부를 수 있는 다윗, 이것이 상생(相生)을 추구하는 복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이다. 이제 이방 나라들의 심판을 통쾌하게 선포하는 다윗에게서 내가 부를 노래를 배워야 할 시간이다. 이게 오늘 묵상을 가슴 뛰게 한다.
‘다윗그룹’의 노래: 애가(愛歌)
감사와 기쁨의 노래(1-2)가 있기까지 다윗은 원수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3). 다윗은 바로 거기에서, 그러니까 ‘원수들’의 우겨쌈에서 오늘 부를 노래의 악상을 호흡해내기 시작한다. 승리라는 결과를 보면 그의 일련의 언행이 쉽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희망의 출구가 보이지 않은 원수들 앞에서였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칙칙한 어제의 고통을 날려버리고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고, 마침내 원수들은 망하여 물러갔다(3). 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다(4). 이것이 다윗의 애가(愛歌)를 지탱하는 탄탄한 멜로디다. 어디에도 다윗의 공치사(자화자찬)는 없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3a)
어제의 은혜에 대한 오늘의 감사,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다윗은 거기서 다시 하나님을 바라본다. 계속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이 일을 이루신 주님을 전하고, 자신은 기쁨을 따라 살아갈 것을 찬양에 담아 주께 고백으로 드린다. 그는 이런 미래가 또 오늘이 되어 과거로 흘러갈지라도 그것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언제나 푸르고 푸른 하나님의 계절을 따라 살아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너희’(11-12)의 것이 되고, 바로 그 ‘너희’(9-12,18)와 더불어 함께 찬양하기를 소망한다. 나에게서 너희로 흘러가기를 원하는 다윗의 넉넉함이 아름답기만 하다.
‘이방그룹들’의 노래: 애가(哀歌)
다윗으로 하여금 실패와 좌절의 애가(哀歌)를 부르게 하려고 몸부림친 원수들의 발버둥침이 오히려 자신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자충수 쪽으로 결론이 나는 부메랑이 될 줄이야.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절묘함이다. 하나님은 선(善)을 악(惡)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아무리 되돌릴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악(惡)일지라도 그분은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원수들이 착각한 것이 이것이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진다.”는 말처럼 자신이 실패하는 것을 빤히 알면서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처지, 이게 원수들에게 딱 맞는 그림이다(15). 한 때는 기고만장(氣高萬丈)했겠지만 그 마지막 결과는 이렇듯 참담한 파멸이다.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7-8,16,19). 이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줄 모르는 원수의 결말이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다. 그는 뛰어봤자 벼룩에 불과한 인생일 뿐이다(20). 다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하고 난 이후에,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수업료를 지불한 후에야 인생임을 알게 된다는 점(20), 이런 시나리오의 대상이 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너희’가 부를 노래](9-12,18)
압제를 당하는 자(9)
환난(9)
주의 이름을 아는 자(10)
주를 찾는 자들(10)
가난한 자들(12,18)
궁핍한 자(18)
다윗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너희’를 바라본다. 이게 은혜의 사람으로서의 다윗 됨이다. 원수들이 판 웅덩이라는 이런 절박한 형편에서도 너희가 보이고,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함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앞으로 나아갈 줄 아는 것 또한 다윗의 강점이다. 다윗의 하나님은 지금도 압제와 환난 가운데 영육(靈肉) 간에 가난한 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을 알고 또 찾는 자들을 만나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지금 악인 앞에서 다윗이 흔들림 없이 고백하는 신앙이자 찬양이다.
특별히 믿음의 세계에는 독불장군(獨不將軍)이란 없다. ‘나 홀로’는 아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보이고, 그래서 나만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들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또한 맛보며 사는 것은 더함 없이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너희편’(11-12)이 갖는 절묘함이다. 나에게도 다윗처럼 너희를 목마름으로 품고 함께 가고 있는지 긴 호흡으로 품어본다.
너희를 찬양의 자리에 초대해 내는 다윗에게서 타자(他者)를 향한 섬김과 사랑을 배운다. 우는 자들로 함께 울고, 웃는 자들로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이 이것이다. 다윗(나)의 자리에서 너희를 품는 것도 아름답지만, 다윗 같은 사람을 통해서 고통을 끊고 승리의 깃발을 주께 드릴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복, 둘 다 내 몫(역할)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 안에 있다는 건 빼앗길 수 없는 축복이다. 나(다윗)의 자리에서 너희를 만나고, 너희의 자리에서 다윗처럼 섬겨주는 자를 만나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시편 9편 역시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겠지 싶다. 나도 주님을, 그리고 내게 붙여주신 너희에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천상에 울려 퍼질 나의 노래, 지금 치열하게 진행되는 이곳에서 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