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1355주일 | 나의 길은 막히고, 주의 길은 열릴 때(행16.6-15)

1355주일 | 16.6-15

나의 길은 막히고, 주의 길은 열릴 때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15.36)에서 알 수 있듯이 앞서 1차 전도여행에서 방문했던 아시아(갈라디아 지방 버가/안디옥 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 13.13-52 14.1-28)를 중심으로 다시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먼저 성령([1])께서, 예수의 영([2])이 계속해서 그 계획을 허락하지 않으셨다(6-7):

 

[1] 6a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2] 7b -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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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전도여행 | 지도출처(기쁨조미료의 블러그)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m_jackson_ko&logNo=221046545395

 

마게도냐인의 환상(6-10)

 

하나님을 위해서 결단하고 언행(言行)하며 나아가도 그것이 거절되고, 또한 막힐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 무슨 뜻만 품으면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명분과 꿈과 목적과 동기가 선하고 좋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그래서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일이 잘 될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확신일 수 있다.

종종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은 이처럼 다를 수 있다. 때문에 내가 계획하고 원하는 뜻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거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 스스로 비장하게 뜻을 품었다가 그게 자기 원대로 되지 않으면, 그러다가 다시 스스로 낙심하고 흔들리는 것 아니겠는가. 이처럼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좌절과 실패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다가 신앙과 믿음과 교회생활을 포기하기도 한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실패도 없고, 물론 성공도 없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가는 길이 막힐 때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알 때까지 시도하고 도전하고 행동한다. 막히고 거절되고,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고, 잘 모르겠을 때도 바울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멈춰있지 않았다. 또한 불안해하거나, 무엇보다도 자기 잘 먹고 살자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자고 하는 일인데 하나님이 너무하신다는 둥, 혹은 자꾸만 하나님의 앵글에서 빗나가니까 스스로 시험에 든 나머지 그만 넘어지지 않았다.

 

빌립보와 루디아(11-15)

 

하나님이 막으셨다면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곳이 있다. 그것이 마게도냐(유럽) 지역의 의뜸가는 도시 빌립보다. 이 열린 길은 바울 스스로가 계획하거나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쪽에서 시작하고 진행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은 내가 만들거나 여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성령충만해도,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도, 천하의 사도 바울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편으로부터 주어지고 또한 알려진다.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따라 드로아 빌립보에 바울 일행이 가게 된 것이 그것이다. 이로써 마침내 [유럽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다(8-12).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대인 남자 10인만 있어도 회당이 세워지는데 안식일(13)임에도 빌립보에는 회당마저 없는 모양이다. 그만큼 당시 빌립보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그래서 영적으로 척박한 땅이었다. 그런데 회당이 없다면, 그러면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어딘가에서 모일 것이라는 것을 바울은 생각해 낸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찾았고, 이때 강가에 모여있는 여인들이 바울의 눈에 들어왔다.

이미 그곳에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루디아가 와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가 안식일에 강가에 여러 여자들과 함께 모여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에 오기 이전에 벌써 하나님은 루디아를 준비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셨다(14). 이렇게 해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으로 거듭난다(15a). 그리고 그녀의 가정에서 바로 그 빌립보교회가 시작된다(15b). 하나님은 이미 루디아를 예비해 놓으시고 바울을 통해 유럽선교의 문을 활짝 열기 시작하고 계셨다. 바울의 열정과 열심보다 하나님은 더 일찍, 더 멀리 보고 계셨고, 그리고 바울의 불타는 헌신을 하나님의 시간표로 바꾸심으로써 바울의 계획이 아닌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신다. 이처럼 내가 하는 것 같아도, 내가 계획하고 일하는 것 같아도, 내가 뜻을 품고 달려드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섭리를 이루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所願)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

 

바울은 하나님이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여주시기까지, 그 전에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그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신앙이 있고 믿음이 좋다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되는 일도 되지 않는 일도 없는 삶으로 익숙해져 가는 것은 바른 신앙생활일까. 아니다. 바울은 어떤 면에서 자신을 하나님이 막으셔도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붙든다. 그것은 교만도 아니며, 그러기에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에도 결코 낙심하거나 슬퍼하지도 않는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고, 이를 위해 하나님이 앞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면서 실수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으려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비록 6-8절처럼 살아도 하나님은 9절 이하로 이끄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움직이며 도전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좇아”(3.14) 가는 것이 믿음의 걸음이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6-8절처럼 사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6-8절처럼 살아도 그럼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을 이루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188658일 미국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코카콜라(Coca-Cola) 음료회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코카콜라(Coca-Cola)는 출시 첫 해에 단 400병이 팔렸다.” 유럽 전도는 이처럼 초라해 보이는,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방황하고 있을 때, 회당조차도 세워지지 않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빌립보로부터 이처럼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아시아는 ‘NO’로 응답하시면서까지 마게도냐(유럽) 지역의 으뜸가는 도시 빌립보를 보고 계셨다. 하나님은 내가 6-8절처럼 살고 있는 순간에도 누군가를 보고 계신다. 나의 가족과 가정을 보고 계신다. 우리 다음세대를 보고 계신다. 청년들을 보고 계신다. 시온찬양대를 보고 계신다. 그렇다, 우리 양무리교회를 보고 계신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비록 두 번이나 연속해서 헛발질을 하고 있어도 6-8절이 우리가 서야 할 부르심의 자리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쓰시겠다 하신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9b)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맡기신 <양무리행전>이다.

나의 길은 막히고, 주의 길은 열릴 때, 그때가 주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는 영광스러운 때다. 지금 나의 길이 막혔다고 느끼고 있는가? 그러면 주께서 곧 주의 길을 여시고 나를 기다리실 것이다. 이 기대와 신뢰와 기다림과 소망이 우리의 믿음이 자리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