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6주일 | 행19.11-22
에베소는 지금 ‘영적전쟁’ 중이다.
“내가 3년 동안을 밤낮으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행20.31a; 쉬운성경)
바울이 3년이라는 긴 시간들을 온 몸 다 해 헌신한 에베소다. 그럼에도 복음에 대한 에베소의 반응이다. 먼저,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비방한다(9a). 또 한편에서는 모두가 다 주의 말씀을 듣고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10,17-20). 그러나 오늘 살펴볼 이어지는 말씀에는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13)과, 제사장의 아들들(14)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과 복음을 대적하고 도전한다.
에베소는 마술의 도시였던 것 같다. 떠돌이 점쟁이들 뿐 아니라 유대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까지(13,14), 그리고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불사른 책의 값이 무려 50,000 드라크마였다는 점에서 그렇다(19). 당시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예를 들어 하루 품삯이 100,000원이라면 족히 50억이나 되는 마술책이 에베소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살라졌다.
이것들이 3년에 걸친 바울의 에베소 사역과 맞물려 있다. 물론 복음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음이 사실이다(11-12,17-20). 하지만 그 사이에도 유대인들 가운데서 <에베소 마술가협회>(13-16; 19절 참조)처럼 세력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공연하게 복음과 예수의 이름을 시장터의 웃음꺼리로 만들어 가려는 분위기가 힘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에베소는 이렇듯 영적 전쟁 중이다.
예수 무당들(13-16): 그러나 악화(惡化)는 양화(良貨)를 구축한다.
에베소는 요한의 세례를 받은 제자(성도)들마저도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2)라고 할 정도로 영적으로 죽어 있던 도시였다. 때문에 바울이 먼저 “3개월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8)였으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9a)였다. 그럼에도 2년 동안이나 –20장 31절에는 3년이다.- 복음을 전했음에도 에베소는 여전히 두 얼굴의 사나이다. 그럼에도 에베소는 오히려 돌아다니며 마술을 행하는 떠돌이 유대인 마술가들(13)과 유대 제사장의 아들들(14)까지 이 마술을 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바울은 바로 이 두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3년 동안이나(20.31) 전하였고, 그러자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10)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 어둠의 세력은 하나 둘 물러가고 새날이 왔다. 하나님이 바울로 하여금 복음 전도와 함께 그의 손으로 놀라운 기적까지 행하게 하신 것이다(11-12).
그러나 가짜 모조품은 전혀 달랐다(13-16). 모양이 비슷하고, 언어가 유사하니까 동일한 것 같지만 이들은 ‘유사 기독교’, 즉 ‘예수 무당’에 불과하다. 속사람은 사탄의 노예이면서 겉모양만 슬쩍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은 지금도 허다하다(마13.24- ). 이런 자들은 세상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믿고 세례를 받은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지만 교회 안에도 있었다. 성령의 역사를 돈으로 사려는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다(8.9- ). 바울도 이와 같은 가라지(가짜)인 엘루마라는 마술사를 예전에 만났었다(13.4-12). 그렇다면 예수님과 복음을 이용하여 결국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자는 결국 예수 무당과 같은 사람이다.
에베소, 다 이 일을 알고 …(17- )
가짜가 아무리 많아도 진짜의 가치와 위대함이 훼손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의 찬란한 빛이 온 세상 앞에 밝히 드러나는 법이다(17-20). 흔히 이단이나, 거짓되고 그릇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상과 언행을 앞세우는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와 십자가의 복음이 도전을 받고 때로는 위기에 처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믿는 사람들이 신문 사회면에 오르내리거나 하면 더욱 그럴 것 같다는 염려도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사실이다. 이것들은 복음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 방해 세력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복음이 확장되는 때는 형통하고, 평화스럽고, 모든 것이 잘 되기만 하는 그런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난과 고통과 핍박과 순교의 위기들 앞에서 복음은 개인과 국가와 민족을 뚫고 들어갔다. 여러 모조품이 기승을 부리고, 그래서 여러 혼돈과 착각이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진짜가 진짜로서의 가치와 능력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승리는 언제나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13-16절을 통해서도 17절 이하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마침내 마귀가 가짜라는 점을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17a) 알게 되었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10절의 역사가 있었듯이, 이번에는 그와 정반대로 예수 무당들은 진짜가 아니라 유사품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17절 이하의 역사가 이어진다.
그뿐 아니다. 에베소는 이제 주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소리로 외쳐지고(17), 많은 성도들 역시 자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였다(18). 이제까지 복음과 무당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필요를 따라 이쪽저쪽으로 쏠려 다니며 살았던 지난 날의 죄악을 고백한 것이다. 마침내 어둠의 세력과 성령의 능력 사이의 오랜 싸움은 끝이 났다. 마술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19-20).
“바울이 … 에베소 …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20.17,19)
바울이 에베소에 오기 전부터, 그리고 3년 동안이나 복음을 증거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도 에베소는 변함없이 13-16절을 반복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이것을 다 알면서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바울이 한 일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날마다’(9b),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님의 능력을 제자(성도)들을 향해 전파하고 가르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바울이 옳았다.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9a)는 사람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강론”(9b)한 것이 답이다. 이같이 2년 동안을”(10a)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으로 영적 기초를 다시 새롭게 일구던 바울의 영적 통찰이 옳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며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은 바울의 수고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소수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저들과 함께 에베소교회를 위해 승부를 걸었던 것이 바울의 에베소 목회였다.
주님은 오늘 아침에 이 에베소교회를 보여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