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6주일 | 창4.1-7
아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아담, 예배와 예배자를 잇게 하다.
마침내 에덴 ‘밖’에서의 첫 이야기가 이어진다. 과연 무슨 이야기일까. 타락과 범죄에 따른 出에덴이 일어나고, 그것에 이어지는 첫 이야기는 무엇일까. 죄 아래서 써가는 첫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1. 부모 아담과 하와에서 그들을 잇는 아들 가인과 아벨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들들이 태어났고, 자랐는데 자신들의 직업이 있다(2). 그런데 중요한 하나가 더 있다. 무엇인가. 놀랍게도 바로 예배다(3-4a). 마침내 부모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라는 죽음과 심판의 끝자락에서, -아들 가인과 아벨의 대(代)에서- 놀랍게도 예배와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창세기 4장은 부모(아담과 하와)가 실패하고,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에덴으로부터 추방을 당한 이후의 이야기다. 그런데 에덴 이후를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살았기에 그의 아들들이 자신들이 할 일만 한 것이 아니라(1-2), 놀랍게도 예배와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을까. 자녀인 아들들이 어떻게 에덴 밖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알았을까.
이것이 아담처럼 실패하고 무너졌을 때에, 바로 그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내고 유지하고 버티어내어야 할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인생의 모습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아담이 에덴에서 타락하고, 그리하여 出에덴하고, 그런 후에, 그러니까 타락하여 무너진 이후를 실망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고, 불평하고, 방황하고, 그래서 예배하는 자와 예배자의 모습이 아닌 –오늘 식으로 말하면, 교회 방학하고, 예배나 성경도 치워버리고, 기도도 하지 않는 등- 양이나 치고 농사나 하며 사는 자로 부모가 되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이미 죄인이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니까. 그러면 이 아들들은 역시 딱 1-2절의 모습까지만 알고 행하고 살아가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아담과 어머니 하와는 부모로서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 살아냈던 것이다. 어떤 형편에서죠? 예, 범죄하고 타락한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이나 치고 농사나 짖고 사는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불신자가 아니라 –신앙의 줄을 놓치 않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예배자로, 예배로, 제사와 제사장으로 살아가면서 어떻게든 더 무너지지 않고 심판의 불쏘시개가 되는 것으로부터 자신과 자녀들과 가정을 지켜나간 것이다. 무엇으로죠? 네, 예배와 예배자로서 말이다.
오늘 우리 자녀(아들)들이 가인과 아벨처럼 예배자로 서 있는가. 그러니까 오늘 우리 자녀들이 3-4절의 가인과 아벨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서 있는가. 그렇다면 감사할 일이다. 그러면 이 자식들이 이렇게 되기까지, 그러니까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게 되는 예배와 예배자의 길을 과연 어떻게, 어디서, 누구에게서 배우고 알았을까.
바로 여기가 우리 부모가 서는 자리다. 그러니까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타락과 실패 이후를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게 핵심이다. 그러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우리 부모가 어떻게 사는가, 특별히 자녀들 앞에서 어떤 삶을 사는가, 이것이 아담에게서 읽어내고자 하는 오늘 말씀의 주제다.
실패하고 넘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아담과 하와처럼 예배와 예배자로 자신과 가정과 자녀들을 지켜가며 다시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을 이어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좀 부족해도, 못났어도, 실패하고 실수했어도, 그리고 비록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과 믿음의 여정을 멈추지 않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야 아벨처럼 ‘양 치는 자’로만 살지 않고 부모처럼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녀들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야 가인처럼 ‘농사하는 자’로만 살지 않고 부모처럼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녀들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야 소망이 있는 가정이다. 이것이 자녀를 향한 부모의 기대와 소원과 기도 그 이전에 부모가 살아내어여 할 예배자의 모습이다.
2. 부모에게서 자녀들이 세워지다.
[아버지 아담]
아담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담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 여호와께서 아담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아들 가인 & 아벨]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신지라
이처럼 아담과 그의 제물을 받으시는 하나님과 그를 예배하는 아버지 아담을 아들 가인과 아벨이 보며 자랐을 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4장의 예배자 아들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처럼 아버지 아담이 아담과 그의 제물을 받으시는 예배자로 살았다는 것 아닌가. 다시 정리하면, 아담은 지금 어떤 시간과 상황 속에서 이처럼 예배자로 살았다는 것인가. 다름 아닌 불순종에 따른 타락과 심판과 징계의 때를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처럼 영적 침체의 시간을 다시 예배자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을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버지 아담이 실패한 죄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예배자와 제물 둘 다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셨다. 가인은 이것을 알았어야 한다. 하나님은 내가 비록 예배에 실패해도 다시 예배가 세워지고 회복되는 것을 도우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아담은 이렇게 에덴 밖에서 다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중이다. 에덴에서는 하아와 함께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비록 지금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바로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예배하는 자로 자신을 세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들들에게서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제물되어 나아가는 일이 이어지고 회복되고 그려지기를 갈망한다.
이것이 우리 부모가 서는 자리다. 비록 부족하고 못났어도,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다스림과 임재를 경험하는 에덴으로부터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는 열망과 갈급함이 아담에게서 발견되어진다.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다 잃었어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다 잃어버렸어도, 바로 그 끝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예배하는 자로 일어선다. 이 자리와 모습이 우리의 부모됨이라는 예배와 예배자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자리를 자녀들이 이어간다고 한다면 비록 에덴 밖일지라도 하나님을 인하여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