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수요 | 막9.33-50(1)
제자도Ⅱa_ 제자는 뭔가 다르게 산다.
(맛있는 마가복음, pp.105-106)
두 번째 수난예고(30-32)에 이어지는 제자들의 언행은 퍽 실망스럽다. 아마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2)신 것이 제자들의 경쟁심을 더욱 촉발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종’과 ‘어린아이’의 비유가 제시되고 있고, 그럼에도 38절이자 손과 발과 눈이 제자로서 사는 삶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잘 다스리며 살아야 할 것을 제자도에 담아 다시 상기시키신다(7.20-23). 이를 기초로 이루어지는 바른 제자도는 ‘누가 크냐!’에 있지 않고 ‘서로 화목’에 있음을 삶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이다.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33-37)
첫 번째 수난예고(8.31)와 두 번째 수난예고(9.31) 사이에 제자들에게 나타난 문제점은 믿음과 기도의 결핍이었다(23,29). 그러므로 자신들의 내면세계를 바라보면서 제자로서의 새로운 결단과 같은 뭔가 변화의 소리가 들려왔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지극히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서로 토론하고 있는 주제가 “서로 누가 크냐?”(34) 하고 쟁론(爭論)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주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 당신은 죽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는데 제자라는 녀석들은 도토리 키 제기 수준에서 자기 밥그릇이나 챙기고 있으니 말이다.
주님의 기대와 나의 관심이 이처럼 상반될 수 있다. 혹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은 이것을 요구하시는데 나는 저것을 붙들고 있는 것은 없는지 모르겠다. 주님이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만을 좋아하고, 선택하고, 비전이라, 하나님의 뜻이라 그래 가면서 욕망꾸러기처럼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내 마음을 향해 질문을 던져본다. 그만큼 믿음과 기도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 있는 것이(23,29) 이처럼 제자들을 세속의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영(靈)이 연약해지면 육(肉)이 강해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덤덤하게 ‘종’의 섬김을 한 어린아이를 통해 가르치신다(35-37). 세상은 최고가 되려면 결코 섬기는 종이 되어 끝자리에 서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오히려 남을 지배하고,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하고, 남들에 의해 주어진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 낸 자만이 최고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주인공이라 말한다.
이것은 주님이 사셨던 삶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주님은 섬기는 종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고, 지금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계시는 중이다. 으뜸은 예수님이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종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빌2.5-11).
주님은 죽음을 말하고, 제자들은 “누가 크냐?”며 도토리 키재기나 하고 있다. 완전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과연 이 둘이 합력하여 선(善)을 이룰 길은 무엇인가? 갈 길은 아직 먼데 제자들이라는 친구들의 언행을 볼 때 한심하기 그지없다. 재주는 누가 부리고, 바구니는 누가 챙기는 식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뭔가를 얻겠다는 이 못나고 못난 죄의 근성을 어찌할까. 벌써부터 스스로 알아서 자기 밥그릇 챙기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인가 말이다.
나 역시도 천국에서 받게 될 축복의 몫을 지금 이 땅의 가치로 환산하여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주님께 흥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를 돌아본다. 나는 은혜 받은 손과 발과 눈으로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점점 지옥으로부터 멀어지는 종으로 살고 싶다.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있는, 한 손 불구자로, 절뚝발이로, 한 눈을 가지고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내가 진짜 주님의 제자라면 세상과는 좀 그래도 달라야 한다.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제자들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언제 나 역시 제자들이 받은 책망 앞에 서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