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364주일 | 삭개오입니까?(눅19.1-10)

364주일 | 19.1-10

삭개오입니까?

 

지금 예수님은 유독 이곳을 통과하여지나가시겠다며 여리고로 들어오신다.

 

   삭개오(Zacchaeus) 이력서(1-4)

   *세리장이다(2).

   *부자다(2).

   *키가 작다(3).

   *사람이 많다(3).

   *뽕나무에 올라갔다(4).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렸다(7).

  

또한 삭개오의 직업은 세리장, 즉 총세무관(징세국장)이다. 그는 부자다. 당시 세리는 허가낸(합법적) 도둑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삭개오의 이력을 드려다 보면 그가 얼마나 불의한 부정축재자(不正蓄財者)인가를 보여준다. 한편 그는 키가 작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된 게 세리장이라는 신분이었음에도, 이처럼 여러 한계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예수께서 지나가는 길목의 뽕나무 위로 올라간다(4a). 특별히 보고자 하되’(3)는 미완료형인데, 이것은 삭개오가 계속해서 보기를 애썼다는 점을 시사한다. 지금 삭개오의 모습은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이다. 예수님을 볼 때까지, 그분을 만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매달리는 끈질긴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과연 왜 그랬을까.

 

삭개오야!(5-10)

사실 예수님이 지나가셨다면 그뿐이다. 그런데 여리고를 통과해 가시는 것에서도, 삭개오를 지나치지 않으시는 것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

삭개오는 주님이 명하시자 곧 급히 내려와”(6) 주님 앞에 선다. 또한 5절에 대한 응답으로써 즐거워하며 영접하”(6)였다. 그의 내면의 변화 역시 숨 가프다: 주여 보시옵소서!”(8a) 예수님을 가리켜 주여!’라고 고백한다. 언제 하겠다는 것인가. ‘지금바로 시행하겠다는 철저하고도 분명한 선언(결단)이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b)

 

삭개오입니까?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기사로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삭개오 이야기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18.9-14, )에 바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앞에서 세리의 회개 기도를 실행하는 것,(삭개오) 이것이 구원’(9)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삭개오를 찾고 계신다. 그를 만나시고자 발걸음을 재촉하신다. 이 걸음이 지금 여리고를 지나서, 예루살렘 광장을 지나서, 오늘 예배 가운데 나에게로 향하고 계시다. 오늘도 나의 삶의 자리에까지 이르사 쳐다 보시고”(5a) 주님은 우리 이름을 부르신다. 삭개오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던 주님께서 나도 그처럼 보시며 이렇게 맞아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 내가 너의 집으로 가고 싶다. 집에서 좀 보자.” 무슨 말인가. 오늘 예배 가운데 이르사 나를 쳐다 보시고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찾아가도 되겠느냐. 넌 나를 맞을 준비가 되었느냐. 내가 너 안으로 들어가 너로 더불어 교제할 수 있겠느냐! 내가 오늘 네 집으로 너를 찾아가도 되겠느냐.’ 이는 내가 삭개오처럼 거듭나고 회개하고 결단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비로소 일어날 사건이다.

 

이제 내 차례다. 이 이야기(삭개오)가 삭개오로 마지막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본 받아야 하고, 내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이 시대 삭개오처럼 살아가는 자로 하여금 주께로 나아오게 해야 한다. 10절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만나면 이처럼 행복해지는 것이 늘 새롭다. 주를 향한 그의 진솔한 마음, 그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 이 모습이 아름답다.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은 없다. 있다면 용서 받기를 거부한 죄인이 있을 뿐이다. 모두가 다 죄인이지만 거듭난 죄인으로 주님을 맞는 삭개오에게서 같은 죄인으로서 내가 취해야 할 삶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주님과 나의 눈이 마주친다. , 언제나 이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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